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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해적 깨달음과 점점 닦음[解悟漸修]

白道 박만주 2012. 5. 12. 09:54

 


 

 13.이해적 깨달음과 점점 닦음[解悟漸修]


頓悟漸修라 함은 頓悟(日出과 孩生)와 漸修(霜消와 孩長)이니 解悟니라.


돈오점수란, 해가 뜨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비유되는 ‘돈오’와 서리가 녹고 아이가 자라남에 비유되는 ‘점수’다. 그러므로 여기서 ‘돈오’란 ‘해오(이해적 깨달음)’를 말한다.


우선 頓悟하여 바야흐로 漸修함은 이는 解悟이다. 그런 故로 華嚴에서 說하되 始初發心할 때에 문득 正覺을 성취한 연후에 三賢과 十聖을 次第로 修證한다고 하였다.


먼저 돈오한 다음에라야 점수할 수 있다 함은 ‘해오’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맨 처음 발심할 때 그대로 정각을 성취한다. 그리고 나서 3현과 10성을 차례로 닦아 증득한다”고 하였다.


교가의 수행방법인 해오점수는, 당장 그 자리에서 무심해져 부처자리를 단박 깨치는 선문의 종지와는 정반대다. 금과 모래를 구분하지 못하고 옥과 돌을 혼동하면 큰 과오가 생긴다.


頓悟한 후에는 始初로 十信位에 得入한다.

돈오한 뒤에야 비로소 10신 지위에 들어간다.

처음 頓悟한 者는 說法을 못 하며 他人의 問難에 대답도 전연 못 한다.

처음 돈오한 이는 설법도 못 하며 다른 사람이 묻고 따지면 전연 답하지도 못한다.


견성은 원통(圓通)을 깨친 구경각이므로 10신의 첫 지위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인 돈오는 견성이 아니다. 예로부터 선문에서 돈오했다 함은,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로 시험하여 청천백일처럼 분명하게 정답을 대지 못하면 쫓겨나서 인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교가에서 돈오했다는 10신 지위는 바른 깨달음이 아니므로 설법도 못 하고 까다로운 질문에 대답도 못 함이 당연하다. 원증(圓證)을 내용으로 하는 선문의 돈오, 즉 견성과 해오를 가리키는 교가의 돈오와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이 頓悟漸修의 意義는 一藏大乘에 구비하였는데, 起信論 圓覺經과 華嚴經이 그 宗이다.

이 돈오점수의 뜻은 여러 대승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기신론, 원각경, 화엄경이 그 주된 부류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말하는 선문돈종의 ‘원증’을 3현10성을 차례로 닦아 증득한다는 교가점수의 ‘해오’에 갖다 붙이려는 무리는 결국 그 사람의 파멸을 자초한다.


우선 心性이 본래 淸淨하고 煩惱가 본시 空寂함을 深信了解하여서, 그 信解를 依持하여 薰習修行함이 무방하니라.


우선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시 공적함을 깊이 믿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신해를 바탕으로 차츰 익히고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이 믿고 이해함[信解]은 해오인 돈오를 말하는 것으로, 교가의 돈오점수사상이다.


홀연히 善知識의 지시로 入路하여 一念에 回光하여 자기의 本性을 得見하여 이 性地에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本然으로 具足하여 곧 諸佛과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는 故로 頓悟라 한다. 비록 本性이 諸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悟得하였으나, 無始의 習氣를 창졸히 제거하기 難하므로 悟를 依持하여 修習한다. 점점 薰習하여 그 功이 성취되어 聖胎를 長養하여 久久에 成聖할새 漸修라 하느니라.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길을 찾아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아, 이 성품 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한다.


비록 본성이 모든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깨치긴 하였으나 먼 옛날부터 내려온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침을 의지하여 닦아 익힌다. 점점 익혀서 공이 성취되어 오래오래 성태를 기르다 보면 성인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점수’라 한다.


앞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견성이란 원통(圓通)을 깨쳐서 10지를 단박에 뛰어넘은 구경각, 즉 원증을 말한다.


그런데 10신초의 해오를 가지고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와 조사의 말씀에 전연 위배된 독창적인 학설이다. 어떤 논리나 설명도 부처와 조사의 말씀에 위배되면 불교인으로서 단연코 물리치지 않을 수 없다.


自性이 본래로 空寂하여 佛과 다르지 아니함을 頓悟하였으나, 이 舊習을 졸연히 頓除하기 甚難하다. 그런 故로 逆境이나 順境에 봉착하면 瞋喜와 是非가 치연히 起滅하여 客塵인 煩惱妄想이 前日과 다름없다. 만약에 般若智慧로 가공하여 著力하지 않으면, 어찌 無明을 對治하여 大休歇地를 얻으리오. 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佛陀와 동일함을 頓悟하였으나 다생의 習氣가 甚深하다. 風勢는 정지하나 파도가 오히려 漓湧하고 性理는 現前하였어도 妄心이 오히려 侵入한다. 그런 故로 悟後에 장구히 모름지기 反照審察하여서 妄念이 홀연히 生起하거든 전연히 隨去하지 말고 損減하고 또 損減하여 寂然無爲함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究竟이니 천하 善知識의 悟後 牧牛行이 이것이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돈오했으나 오랜 습관은 갑자기 없애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 까닭에 맞고 안 맞는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꺼지고 바깥 티끌인 번뇌망상이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지혜로 힘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쉬어 버린 경계를 얻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부처와 똑같음을 돈오했으나 수많은 생에 익혀 온 습기가 매우 깊다. 바람은 자도 물결은 출렁이듯 성품도리가 눈앞에 드러났어도 망심은 아직 침입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다음에 반드시 오랫동안 되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언뜻 일어나면 조금도 따라가지 말고, 덜고 덜어서 적연무위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끝나는 것이다. 천하 선지식들이 깨친 다음 수행한다는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해오는 거칠고 무거운 망상[麤重妄想]을 벗어나지 못한 헛된 경계이므로 객진번뇌가 여전히 맹렬하게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이 깨친 뒤 점점 닦는 것[漸修]이다.


선문에서는 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 아뢰야의 미세한 망상까지 영원히 끊어 버린 구경무심의 크게 쉬어 버린 지위가 돈오이며 견성이다. 그러므로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증득한 이 무심, 무념, 무위, 무사의 금강대정(金剛大定)을 보임하는 것이 성태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해오의 상반된 내용을 견성이라고 혼동한 것은 일대 착오이다.

 

교가에서는 객진번뇌가 여전한 ‘해오’를 ‘돈오’라고 주장한 이상, 번뇌망상을 없애 크게 쉬어 버린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점수문(漸修門)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문의 바른 전통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망상을 없애고 진여를 증득한, 크게 쉬어 버린 지위가 돈오이며 견성이므로 견성만 하면 그대로 무심해져 약과 병이 다 없어지고 교(敎)와 관(觀)이 동시에 쉰다”고 단언한 것이다. 따라서 해오에서의 점수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서로 반대 내용인 선문의 원증인 돈오와 교가의 해오인 돈오를 혼동하여 수도의 바른 길을 파괴함은 부처와 조사의 바른 전통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圭峯이 先悟後修하는 의의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였다. 結氷된 池塘이 全體로 流水임을 알아서 陽氣를 차용하여 銷融시키고, 凡夫衆生이 卽是佛陀임을 悟解하여 法力을 依資하여 薰修한다. 氷塊가 銷鎔되면 水流가 潤滑하여 바야흐로 灌漑와 洗滌의 功果를 얻고, 妄念이 滅盡하면 心靈이 圓通하여 玄通한 神光의 大用이 應現한다.


규봉은 먼저 깨치고 난 다음에 닦는다는 뜻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얼어붙은 못이 전부 물인 줄은 알았으나 햇볕을 빌려야 녹일 수 있듯 범부중생이 곧 부처임을 알았으나 법력을 의지하여 차츰 익히고 닦는다. 얼음덩이가 녹으면 물의 흐름이 원활하여 마침내 물대고 씻어내는 효과를 얻듯 망념이 다 없어지면 마음의 신령스러움이 원통(圓通)하여 현묘하게 통하는 신령스런 빛의 큰 작용이 나타난다.”


견고한 얼음덩이가 전부 녹아서 힘차게 흐르는 물로 쓰이듯이, 번뇌망상이 확연히 소멸하여 무구진여를 증득한 것이 견성이며 원증이므로, 견성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망념이 없어져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러므로 얼음덩이가 본래 흐르는 물임을 분명히 알았으나 얼음덩이는 여전하듯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해오하였으나 망상이 일었다 꺼졌다 함을 돈오견성이라고 하고, 얼음덩이를 녹이듯이 망상을 제거하는 점수를 선문의 바른 전통이라고 극력 주장함은 참으로 선문의 바른 전통에 어긋난 억지주장이다.


비유를 들면 혹한인 冬節에 流水가 凝結하여 堅氷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에 이르면 堅氷이 消釋되어 流水로 환원함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에는 本性이 凝結하여 妄心이 되었으나, 중생이 正悟할 때에는 妄心이 消釋하여 本性으로 환원한다.


비유하면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이 굳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따뜻한 시기가 되면 얼음이 녹아 다시 흐르는 물이 되듯이, 중생이 미혹할 때는 본성이 굳어서 망심이 되었다가 중생이 깨쳤을 때는 망심이 녹아서 다시 본성이 된다.


망심의 단단한 얼음덩이가 완전히 녹아서 자유로이 흐르는 물이 되어야만 돈오며 견성이다. 단단한 얼음덩어리 그대로가 본래 흐르는 물이며 망심 이대로가 원래 참 성품인 줄 알기만 한 것을 가지고 돈오견성이라 함과는 남북의 차이가 있다.


일체 惡業과 貪瞋痴인 無明煩惱와 각종의 塵勞 등은 다 自性이 없고, 眞如本心을 미혹함으로 인하여 妄念에 依止하여 있다. 淨水가 寒氣로 인하여 凝結하여 堅氷이 된 것과 같다. 이 眞如本心을 正悟하면 一切妄念이 그 正悟를 따라서 소멸하니, 堅氷이 慧日의 照熱로 인하여 다시 淨水로 歸復함과 같다. 그런데 지금 氷塊의 處理를 말하는 것은 진실로 미혹한 인간 중에 한층 더 미혹한 인간이다.


모든 악업과 탐진치인 무명번뇌와 갖가지 6진 번뇌 등은 다 자성이 없다. 그것은 진여본심을 미혹했기 때문에 망념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다. 마치 물이 추위 때문에 굳어서 얼음이 된 것과 같다. 이 진여본심을 바로 깨치면 단단한 얼음이 밝은 햇빛의 열기로 다시 맑은 물이 되듯이 모든 망념이 그 바른 깨달음을 따라 소멸한다. 그런데 이 마당에 얼음덩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말한다면 참으로 미혹한 사람 중에 미혹한 사람이다.


이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듯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한 종문 정안종사들의 일관된 통설이다.


그러므로 얼음 녹듯 망념이 다하지 않으면 아직 미혹한 꿈속이어서 깨달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미혹 중의 미혹인 헛된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圭峯이 先悟後修의 뜻을 摠判하여 말하였다. 此性이 원래로 煩惱가 없으며 無漏한 智性이 본연히 구족하여 佛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頓悟하여 이를 依止하여 修習하는 사람은 이를 最上乘禪이라 하며 如來淸淨禪이라 名稱한다. 만약에 능히 念念에 修習하면 자연히 百千三昧를 점점 획득하나니, 達磨門下에서 展轉하여 대대로 相傳하는 것이 곧 이 禪이라 하였다. 그런즉 頓悟와 漸修의 二義는 乘車의 二輪과 같아서 한 개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규봉은 먼저 깨치고 나서 수행한다는 ‘선오후수’의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였다. “이 성품이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지혜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서 부처와 차이가 없음을 돈오하고 이에 의지하여 닦아 익히는 것을 최상승선,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이름한다. 만약 생각생각에 닦아 익힐 수 있다면 자연히 점점 백천 가지 삼매를 얻으리니, 달마(達磨) 문하에서 계속하여 대대로 이어온 것은 곧 이 선이다.”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 이 두 뜻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한 개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달마를 정통으로 이은 선문의 거장들은 한결같이 무심무념인 구경각의 원증을 돈오, 견성이라 하였다. 또 10지․등각을 초월하여 미세망념이 다 없어진 부처자리에서의 무생법인을 바른 깨달음,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하였다.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없는 해오를 가지고 달마 문하에서 이어 내려온 선종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큰 망언이다.


이 頓悟漸修의 兩門은 곧 千聖의 軌轍이니, 從上의 諸聖이 先悟하여 後修하고 修習함을 인하여 證得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돈오 점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고 간 법칙이니 예로부터 모든 성인은 먼저 깨치고 난 다음에 닦았으며 이 닦음을 통해서만이 증득했다.


이는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교가에서는 금과옥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해오를 부정하고 원증에 그대로 들어가는 선문에서는 비상과 짐조의 독 같은 독약이다. 만약 이것을 선문이라고 주장한다면 달마의 정통은 꿈에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頓悟漸修는 敎理에 甚深히 諧當하고, 頓悟頓修는 宗鏡 즉 禪宗에 眞正 適當하니라.

돈오점수는 교가의 이치에 해당하며, 돈오돈수는 종경, 곧 선종에 해당한다.


明鏡이 본래 청정한지라 어찌 塵埃를 拂拭할 필요가 있으리오 하였으니, 이는 六祖가 本性을 直顯하여 그 漸修를 打破함이니라.


“밝은 거울이 본래 깨끗한데 티끌 먼지를 닦아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육조가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점수를 쳐부순 것이다.


이는 금과 모래, 옥과 돌을 잘 가려내는 눈밝은 이의 정론이다. 해오는 교가의 수행인 점진적인 길이요, 원증은 선문에서 도를 깨치는 지름길이니 이를 혼동하면 자기도 그르치고 남도 그르친다.


미혹한 인간은 점점 契合하고 悟達한 高人은 頓然히 修斷한다.


自性으로 自悟하여 頓悟하고 頓修하여 또한 地位漸次가 없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자기 본성을 스스로 깨쳐 단박 깨치고 단박 닦아서 결국 지위와 점차가 없다.


달마를 바로 전한 6조의 바른 법은 오직 돈(頓)일 뿐 점(漸)은 없다. 점수문은 미혹한 경계에서만 있을 뿐이요, 깨친 경계는 아니므로 6조는 오직 돈오돈수의 원증(圓證)인 견성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를 내용으로 하는 원증만이 6조의 바른 전통이니 돈수원증이 아니면 깨침[悟]이 아니다.


頓悟頓修라 함은 이는 上上智를 설함이니, 根性과 樂欲이 전부 殊勝하여 一聞하면 千悟하여 大摠持를 證得하여서 一念도 不生하여 前後際가 頓斷한다. 障惑을 斷除함은 一綟絲를 斬斷하는 것과 같아서 萬條를 일시에 頓斷하며, 聖德을 圓修함은 一綟絲를 염색, 萬條를 일시에 頓色한다. 이 사람의 三業은 유독히 明了하여 他人은 엿보지 못하나니, 또한 事跡上에서 논하면 牛頭融大師의 類이다.


돈오돈수는 가장 으뜸가는 지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근성이 뛰어난 데다가 공부를 좋아하니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를 증득하고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뒤가 딱 끊긴다. 마치 한 타래 실을 잘라 만 가닥을 한꺼번에 자르듯 장애를 끊고, 한 타래 실을 물들여 만 가닥을 한꺼번에 물들이듯 성스런 덕을 원만히 닦는다. 이 사람의 삼업(三業)은 유독 밝아서 다른 사람은 엿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사례를 든다면 우두 융(牛頭融)대사와 같은 이들이다.


돈오돈수는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며 앞뒤가 끊어진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달마 문하에서 전해온 견성은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하는 데 있으므로 달마 후손의 정안종사 중에 한 생각도 나지 않는 무심삼매를 실제 증득하지 않은 이는 없다. 뿐만 아니라 비록 한 생각도 나지 않게 되어도 아무것도 없는 이 경계에 머물러 버리면, 크게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승묘경계라 하여 배제한다. 이 깊은 굴에서 뛰쳐나와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구경무심이 정안(正眼)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선은 한 생각도 나지 않는 돈수(頓修)에 있는 것인데,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해오에서의 점수(漸修)를 달마선이라고 주장함은 천고의 대과오이다.


그리고 돈수는 우두(牛頭) 같은 뛰어난 이에게만 속하고 달마의 법을 전한 이들은 모두 점수하는 이라고 하여, 달마 문하는 전부 우두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되니 한층 가소로운 일이다. 달마를 정통으로 잇는 사람 중에 우두보다 못한 이는 없을 뿐 아니라, 황벽(黃檗)은 ‘우두가 향상일로의 한 도리는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지탄하였다. 이로써 달마선이 점수에 있다 하는 주장이 억설임을 알 것이다.


각각 反照하여 보아서 有病하면 치료하여야 하고 無病하면 用藥할 필요가 없느니라.

각각 되비추어 보아서 병이 있으면 치료해야 하고 병이 없으면 약을 쓸 필요가 없다.

해오는 망상 병이 있으므로 점수라는 법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견성은 망상 병이 없는 원증이므로 약을 쓰지 않는다.


馬祖는 頓悟門에는 비록 근사하나 적당치 못하고 漸修門에는 착오하여 전연 乖戾되었다.

마조의 종지는 돈오문에 가깝기는 하나 꼭 맞지는 않고 점수문에는 그릇되어 전연 어긋난다.


규봉이 말하는 돈오는 10신에서의 해오이며 마조가 말하는 돈오는 불지에서의 원증이다. 규봉은 병이 있으니 고쳐야 하고 마조는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 없다. 규봉은 객진번뇌가 여전하므로 점수가 필요하나 마조는 망념을 단박 없애 무생법인을 철저히 깨쳤으므로 돈수마저 필요 없다. 해오를 주장하는 규봉의 얕은 소견으로 마조가 말한 원증의 깊은 경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환자인 규봉이 완쾌한 마조를 약 먹지 않는다고 비난 공격함은 어린아이의 장님놀이로서 천하가 폭소할 일이다. 달마정전은 병이 나으면 약을 버리듯 망념이 없어져 진여를 증득한 것이니, 환자인 규봉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


또한 徹悟하여 實證한 形跡도 오히려 心中에 용납하지 않거든 하물며 信解리오. 순전히 이는 識情妄見이니 그 至道의 本體에 親하려 할수록 더욱 疎하여지고, 近하려 할수록 더 遠隔하여진다. 그리하여 자신도 大道를 會通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會通케 하리오.


철저히 깨쳐 실제 깨쳤다는 자취마저도 마음속에 용납지 않는데 하물며 10신의 해오이겠는가. 순전히 이것은 식정(識情)의 망견으로서, 지극한 도의 본체에 가까이하려면 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자신도 큰 도를 통달치 못하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통달케 하겠는가.


선문의 정통사상은 이것이다. 중봉(中峯)국사는 임제(臨濟)를 바로 이은 정안종사로 선문의 표준이다. 구경무심지를 철저히 깨쳤어도 그 깨친 자취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정안이 아니다. 해오는 큰 도와는 완전히 배치되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바른 안목을 가리는 가장 큰 병통이므로 앞서 깨친 분들이 극력 배격한 것이다.


悟解한 者는 語言이 더욱 工巧할수록 本旨는 더 暗昏하고, 言語가 더욱더 奇妙할수록 性理는 더 昏昧하니라.


해오로 깨달은 이는 말이 교묘할수록 본래 뜻에는 더욱 어둡고, 말이 기묘할수록 성품도리에는 더 어둡다.


신해, 오해, 해오는 같은 내용이다. 해오는 큰 도에는 이와 같이 상반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만약 근본상으로부터 공부를 하여서 八識의 窠臼를 타파하고 無明의 窟穴을 頓飜하면, 一超하여서 佛地에 直入하여 다시는 남은 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根의 實證한 바이다. 八識의 근본을 未破하면 비록 得力한 作爲가 있어도 이는 전혀 識神의 妄邊事이니, 만약에 이로써 眞正을 삼는다면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 古人이 말하기를 學道하는 人士가 眞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을 誤認하기 때문이다. 이는 無量劫來의 生死根本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을 透過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근본적으로 공부하여 제8식의 소굴을 깨뜨려 버리고 무명의 굴을 단박에 뒤엎어 버리면 한번 뛰어 부처 지위에 그대로 들어가 다시는 남는 법이 없다. 이는 가장 뛰어난 근기가 실제로 깨치는 것이다. 8식의 근본을 다 부수지 못하면 비록 공부해서 얻은 효과가 있다 하여도 이는 전적으로 허망한 식신(識神) 쪽의 일이다. 만약 이것을 참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도적을 친자식으로 오인하는 것과 같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법을 알지 못함은 다만 이제껏 식신을 잘못 알아 왔기 때문이다. 이는 한없는 세월 동안 생사의 근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도리어 본래 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 한 관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8식의 근본인 미세무명을 영원히 끊어서 구경을 실제로 깨치지 않으면 이는 전적으로 망식의 허깨비 경계지 참된 깨침이 아니다. 해오는 참으로 도적을 오인하여 친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은 착각이다.


正悟한 者는 장구한 암흑에서 광명을 만나며 大夢을 홀연히 覺惺함과 같아서, 一을 了達하매 一切를 了達하여 纖毫도 憎愛와 取捨하는 情習이 胸中에 체류하지 않느니라.


바르게 깨친 이는 오랜 어둠 속에서 광명을 만난 것 같고 깊은 꿈에서 갑자기 깬 것과 같다. 하나를 깨치면 일체를 깨쳐서 털끝만큼도 사랑과 미움, 취하고 버리는 망정과 습기가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情習이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 心性을 悟達함이 圓滿치 못한 緣由이다. 혹 心性을 圓滿히 悟達치 못하면 모름지기 그 圓滿치 못한 當處를 소탕할지니, 특별히 생애를 세워서 廓徹大悟하여야 한다. 혹자는 心性을 悟達하되 未盡하였거든 履踐修行하여 未盡함을 窮盡한다 하니, 이는 薪草를 안고 火災를 消滅하려 함과 같아서 더욱더 그 불꽃만 더하게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망정과 습기가 다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마음을 원만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 마음을 원만히 깨치지 못했다면 반드시 그 원만치 못한 그곳을 쓸어 없애 버려야 하니 특별히 생애를 잡아서 확철히 깨쳐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음을 깨쳤으되 미진하면 단계적으로 수행하여 미진함을 없앤다고 하지만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불길만을 더할 뿐이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 그 적나라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경우, ‘언구를 의심하지 않음이 큰 병이다’고 하여 인가하지 않음이 종문의 정안이다. 만약 해오에서의 점수와 같이 이 미진한 것을 단계적으로 닦아[履修] 다하려 한다면 이는 섶을 안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역효과만 낸다. 해오점수의 해독은 이렇게 극심하다.


語言으로부터 見解를 作하여 徹悟를 體得하지 못한 者는 無邊한 狂妄見解를 流出한다. 嗟呼라, 醍醐의 上味는 世上의 珍寶이어늘 如斯狂解人을 만나면 반대로 독약이 되는도다. 참으로 正法이 傾頹하고 邪魔가 熾盛相續하여 권속들이 世間에 彌滿하니, 生死解脫에 留心하는 者는 可히 솔선하여 이 허망한 狂解의 境界를 破碎하지 않으리오.


말 속에서 알음알이를 지어 철저한 깨침을 얻지 못한 자는 한없이 미친 알음알이를 쏟아 내놓는다. 슬프도다! 제호의 맛은 세상에서 제일로 치지만 이처럼 미친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반대로 독약이 되는구나. 참으로 정법이 기울고 삿된 마구니가 들끓어 그들의 권속이 세상에 가득하니 생사해탈에 마음을 두는 이라면 솔선하여 이 미친 견해의 경계를 쳐부수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동(曹洞)의 정맥이며 명말의 거장인 박산(博山)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실제로 깨치지 못한 해오는 모두 미친 알음알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정안종사들은 철저한 깨침 이외는 모두 마구니 설법, 마구니 권속이라 하여 통렬히 배척하였다. 이것은 삿된 것을 꺾어 바른 것을 나타내는 대자비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법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보조(普照)는 『절요(節要)』의 마지막 편에서 해오를 ‘말에 의지해서 견해를 내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즉 박산(博山)이 ‘말 속에서 알음알이를 짓는다’고 한 말이다. 또 『도서(都序)』에서 깨친 뒤 닦아 증득하는 데 열 가지 차례[十重次第]를 열거하였는데, 맨 처음은 해오이며 마지막 열 번째는 “마음이 무념이 되었으니 그를 대각 세존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먼저 깨치고 나서 나중에 닦으며, 닦음에 의지하여 증득한다는 해오점수(解悟漸修)를 설명하는 말이다. 교가에서의 돈오란 맨 처음의 해오요, 선문에서의 견성은 마지막 열 번째의 무념이니,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내용인 해오와 견성을 뒤섞으려 함은 무모한 시도일 뿐 아니라 천추의 망령된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문에서 말하는 견성은 원증인 무념이요, 교가에서 말하는 돈오는 해오로서 망념이 남아 있다. 따라서 견성은 3세(三細)를 영원히 끊은 것이요 해오는 6추도 다하지 못한 것이며, 견성은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함이요 해오는 번뇌가 여전함이며, 견성은 얼음이 녹아 물이 흐름이요 해오는 얼음과 물이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며, 견성은 영겁토록 어둡지 않음이요 해오는 일상에 끊어짐이 있는 것이며, 견성은 묘각의 마지막 과위요 해오는 10신의 처음 마음이며, 견성은 지위(地位)를 단박 뛰어넘음이요 해오는 점점 계급을 거침이며, 견성은 무심을 보임함이요 해오는 점차적으로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용이 상반된 선문의 원증견성과 교가의 해오돈오를 같다고 주장함은 자가당착이다. 이같이 해오를 근본으로 하는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편으로서 선문에서는 통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섶을 지고 불을 끄는 것이며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이며 미친 견해, 마구니 권속이라고 통렬히 배제하였다.


또한 돈오돈수는 우두 같은 특출한 이에게만 한정되고, 달마의 전통은 돈오점수라고 주장함은 달마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큰 착오다. 선문을 벗어나서 교가의 큰집인 화엄종 징관의 법을 이은 규봉의 이런 견지는 평가할 가치조차 없다.



참선하는 납자는 오직 종문의 정전을 법칙 삼아 그 밖의 이단잡설에 속지 말고 정안(正眼)을 활짝 열어 불조의 혜명을 잇고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널리 구제해야 한다.


只今 禪의 宗旨를 錯覺하여 繼承하는 者는 或은 頓悟漸修門으로써 正脈을 삼고, 或은 圓頓信解의 敎理를 宗旨로 삼나니, 그 正法을 誹謗하는 過愆은 余가 어찌 敢히 말하리오.


지금 선의 종지를 잘못 알고 있는 자 중에는 더러 돈오점수문을 정맥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원돈신해의 교리를 종지로 삼기도 한다. 정법을 비방하는 그들의 허물을 내 어찌 다 말하겠는가.


돈오점수와 원돈신해는 선의 종지가 아님을 분명히 한 청허의 명언이다. 청허는 돈오점수와 원돈신해가 선지가 아님을 단언하였을 뿐 아니라, 선교결에서 원돈의 사구(死句)를 가지고 학인을 지도함은 적잖이 남을 눈멀게 하는 짓이고 밖으로만 치달리는 어리석은 미치광이 짓이라고 엄격히 훈계하고 있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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