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 수행의 방식, 셋 - 심신과 자각
수행은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수행 자체가 깨달음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궁극에는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바탕위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수행이 깨달음의 전단계(前段階)로서만 이해되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깨달음의 전단계가 아니라 수행이 곧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입장이라면 새삼스레 왜 수행이 필요한가.
누구나가 깨달음 자체 그대로 완전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처럼 누구나가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것이 자기인식 곧 자각이다.
그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물론 자기이다.
그러나 그 대상으로서의 자기는 인식의 대상일 뿐이다.
더 이상 본래자기가 아니다.
본래자기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법이연(法爾然)한 자기일 뿐이다.
그래서 본래자기를 터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 좌선으로서의 자각이다.
좌선을 통한 자각, 다시 말해 본래자기라는 심신(深信)이 수행이다.
따라서 좌선을 통한 자각의 수행은 본래불을 찾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구비하고 있는 본래자기를 닮아가는 행위이다.
곧 부처를 닮아가는 것이다.
아니 자신의 행위가 부처를 닮아가는 행위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래불의 도리에 대하여 예로부터 대혜종고는 [이러한 (깨달음의) 도리는 사람들마다 두루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보자면 대혜는 본래부터 중생 누구나가 본래자기라는 깨달음을 갖추고 있다는 본각문(本覺門)에 입각해 있다.
그러면서도 달리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에 합치된다] 라든가 [시각을 말미암아 비로소 본각에 합치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중생 누구나 본래자기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번뇌와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본래자기라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갖추고 있던 본래자기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대두된다. 그것이 수행의 필요성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본래자기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곧 대혜가 출발한 시각문(始覺門)의 입장이다. 그래서 누구나 역대 조사들과 삼세제불의 가르침을 통하여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눈을 떠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곧 시각을 통하여 본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혜의 입장은 수행인이 본각의 도리를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본래자기에 대한 심신(深信)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략~~~~
카페 이름 : 사이버불교대학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edubudd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