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大乘起信論] 오형근교수의 대승기신론강의-4

白道 박만주 2012. 11. 12. 10:38

 


 [大乘起信論]

 

 오형근교수의 대승기신론강의-4


[疏〕 自非杜口大士 目擊丈夫 誰能論大乘於離言 起深信於絶慮者哉 所以馬鳴菩薩 無緣大悲 傷彼無明妄風 動心海而易漂 愍此本覺眞性 睡長夢而難悟 於是同體智力堪造此論 贊述如來深經奧義 欲使爲學者暫開一軸 遍探三藏之旨 爲道者永息萬境 遂還一心之原


스스로 두구대사와 목격장부가 아니고서는 누가 말을 여읜 대승을 논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생각이 끊어진 깊은 믿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까닭에 마명보살이 무연대비로써 저 무명(無明)의 망령된 바람이 마음의 바다를 움직여서 쉽게 떠다니게 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이 본각(本覺)의 참된 성품을 장애해서 긴 꿈에 잠들어서 깨어나기 어렵게 한 것을 가엾게 여겨서 이에 동체지력(同體智力)의로 감내하면서 이 논을 지었다.


이 논은 여래의 깊고 오묘한 뜻을 담은 경을 찬술하여,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시라도 이 논의 한 축을 펴서 삼장(三藏)의 뜻을 두루 탐구하게 하는데 있으며, 도를 닦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온갖 경계를 영원히 쉬게 하여 드디어 일심(一心)의 근원에 돌아가게 하는데 있다.


▣ 두구대사와 목격장부

누가 말을 여읜 대승을 논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생각이 끊어진 깊은 믿음(深信)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말과 생각을 여읜 것을 이언절려(離言絶慮)라고 표현하고 있다. 두구대사와 목격장부는 말과 생각을 여읜 가운데서 어떻게 대승을 논하고, 깊은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


두구대사(杜口大士)는 바로 유마거사를 말한다. 유마거사는 재가(在家)의 거사인데 정명(淨名)이라고 불렀다. 속세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의 남자 신도로는 유마대사가 가장 대표적이고, 재가의 여자 신도로는 승만 부인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래서 속세에서 수행하는 재가들에게는 <유마경>과 <승만경>이 가장 유명하다.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에 머물고 있을 때 병이 나서 부처님 제자들이 병문안을 갔다.

유마거사와 부처님 제자들이 법담(法談)을 하면 부처님 제자들이 판판이 지고 왔다. 그래서 누구도 그곳에 가기를 싫어했다. 한번은 <유마경>에서 불이법문(不二法問)을 할 때 문수보살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마거사가 대답을 안 했던 것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법문(法問)을 하는 무진법문(無盡法問)이었던 것이다.


유마거사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고도 설법을 할 수 있는 성자라고 해서 두구대사(杜口大士)라고 불렀다. 두구(杜口)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대사(大士)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선비(開士)라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이다.


목격장부(目擊丈夫)는 <장자>에 나온 이야기인데 기록에 보면 공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났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왜 말없이 헤어졌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공자가쳐다만 보아도 이미 뜻이 통하기 때문에 말이 필요 없었다고 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도(道)는 그와 같은 거라고 말했다.


목격이 도전의(目擊而道存矣) 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마주치기만 해도 서로 도가 통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유명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는 파안미소(破顔微笑)라는 말이 유행 했는데 서로 웃을 때 주름만 보고도 그 뜻을 알아! 차릴 만큼 서로 마음을 잘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가이역 용성의(不可以亦 容聲矣) 는 소리로써 전달한다는 것은 가히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기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제대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문장 자체가 진여법성 아님이 없다. 대승체는 다른 말로 하면 진여의 체를 말한다. 삼라만상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사물(頭頭物物)이 대승체가 아님이 없다. 그렇다면 이 종이에 인쇄된 기신론의 글자 하나하나도 진여의 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나 문자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에서 보면 진실불허라는 말이 나온다. 거기에 부처님 말씀은 진실한 것이고 헛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다 진리다. 그와 같은 진리적 경지를 깨닫고 말하면 바로 그것이 진리의 말이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들은 아직 마음에 번뇌가 있고 여러 가지 잡된 생각(雜染)으로 하는 말! 이 많기 때문에 자기의 진여심과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그 자체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나 문자도 자기의 진여심과 통할 때에는 그대로 진리가 된다.


불교에서는 어떤 면에서 문자나 소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느 경우에는 그것을 믿고 공부도 안 하고 참선만 한다고 하다가 아는 것마저 다 잊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포교도 안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범부로 있을 때에는 번뇌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잘 소통이 안 된다. 그렇지만 보살로 갈수록 말을 잘 하고 오히려 진리를 더 잘 전달하도록 되어 있다. 보살로 갈수록 번뇌가 맑아지고 교리나 진리를 터득하면 말도 잘 하고 이심전심은 전심대로 더 잘 통하게 된다.


▣ 마명보살

마명(馬鳴)은 불멸 후 약 6세기 경에 있었던 사람으로 불교를 개혁했던 사람이다. 마명보살이마명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마명이 태어날 때 성자가 태어날 거라고 말(馬)들이 먼저 알고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명은 학문이 대단히 훌륭하고, 설법을 아주 잘했는데 말들이 마명의 설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에서 마명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명은 용수와 함께 소승불교를 개혁해서 대승불교를 일으켰던 사람이다. 마명은 불교를 전파시키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북을 치면서 논쟁을 일으켰다. 대승불교를 논할 때 마명과 용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마명은 중요한 사람이다.


보살(菩薩)은 보리살타를 줄인 말로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뜻이다. 보리는 지혜 또는 깨달음을 말하며, 살타는 중생 또는 유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정(有情)은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말한다. 중생과 유정은 자신의 불성을 깨우치지 못하고 항상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한다.


반면 보살은 자기의 불성을 깨닫고 밝은 지혜로써 살아가는 깨달은 중생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진리를 실현해가는 주체를 보살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대상은 진여의 체이다. 진여의 체는 내 마음의 본바탕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진여성 또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원효대사는 보살을 상홍불도 하화중생(上弘佛道 下化衆生)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살은 내적으로는 지혜를 구하고, 외적으로는 중생을 구하는 것을 참된 도리로 삼는다. 보살이 수행을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은 자기 위한 것이고, 보살은 수행이나 참선에 그치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타행을 겸비해야 한다.



▣ 무연대비와 동체대비

마명보살은 무연대비로써 저 무명의 망령된 바람이 마음의 바다를 쉽게 떠 다니도록 하는 것을 불상히 여기고, 또한 본각진성이 긴 꿈에 잠들어 깨어나기 어려운 것을 가엾게 여기어 이에 동체지력으로 감내하면서 이 논을 지었다. 여기서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것은 멀고 가깝고 하는 인연을 떠나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자비(慈悲)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연이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세간적인 입장을 설명할 때 많이 사용한다. 연(緣)은 반연이라는 뜻인데 반연은 쉽게 말하면 상대성을 의미한다. 상대적인 관계에서는 반연하는 쪽이 있으면 반연되어지는 쪽이 있다. 반연하는 쪽을 능연(能緣)이라고 하고, 반연되어지는 쪽을 소연(所緣)이라고 한다.


인연이 만나면 생이 있게 되고, 인연이 끝나면 반드시 멸이 있게 된다. 그래서 생멸은 인연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이다. 인연의 세계에서는 어떤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고, 어떤 사람과는 멀게 지내는 상대성이 있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대성은 평등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무연(無緣)이라는 말은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대비(大悲)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으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비(慈悲)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나 외에 모든 존재도 내 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 몸과 같이 생각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동체대비는 무연대비와 같은 뜻이다. 동체대비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사상이다. 법공관(法空觀)은 만법의 진리가 평등하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공(空)이라고 하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공(空)은 모든 번뇌 망상을 다 정화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기신론의 뒤쪽에 가면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이라는 말이 나온 다.


공(空)과 불공(不空)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空)은 모든 번뇌 망상을 퇴치하고 잡염(雜染)과 같은 것이 진여법성에 상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법공관은 바로 평등관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제칠 말나식 정화되면 평등성지가 나타난다. 평등성지는 뭇 중생들과 내가 이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치를 깨달아야 자비가 발생한다.


▣ 무명(無明)과 본각진성(本覺眞性)

무명(無明)은 자기의 존재를 망각함과 동시에 모든 진리를 망각한 어리석음 또는 무지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죄악은 진리를 망각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이와 같은 무지를 타파해서 지혜 를 갖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우리 중생들은 진리를 망각한 무명(無明)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동요되어 마음의 바다 위를 표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본각진성을 망각함으로 해서 긴 꿈을 꾸면서 잠들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불교에서는 대몽(大夢)이라고 한다. 대몽이란 무명이나 번뇌가 본각진성을 감싸버려서 지혜 작용을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번뇌와 무지로 말미암아서 마음의 지혜를 발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불교의 목적은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정화해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있다. 모든 것은 마음! 에 달려있다. 인간의 마음의 본성은 본래 무엇이든지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본각진성이라고 한다. 본각진성은 나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본각진성은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으나 번뇌와 같은 구름에 가리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마명보살은 중생들이 긴 꿈에 잠들어 깨우치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서 동체지력으로 이 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여래의 심오한 경전의 오묘한 뜻을 찬술해서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신론의 한 축을 열어서 삼장(三藏)의 뜻을 두루두루 탐구하게 하는데 있으며, 도를 닦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만경(萬境)을 영원히 쉬게 하고 일심의 근원에 완전히 환원하게 하는데 있다. 대승기신론의 책 속에는 삼장(三藏)의 뜻이 두루두루 들어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만경(萬境)이란 마음속에서 천 가지, 만 가지의 온갖 생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마음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일까지도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까지도 모두 만경(萬境)에 해당된다. 만경이 집착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허구적인 만경을 영원히 쉬게 하고, 마침내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 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일심(一心)은 번뇌 망상을 나 립뺑이전의 마음을 말한다. 일심(一心)은 바로 불성(佛性)을 뜻한다.


5) 두구대사(杜口大士): 두구(杜口)란 법의 현묘함을 언설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 버림을 이름. 불법의 깊은 뜻은 결코 언설로 전달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


6) 목격장부(目擊丈夫): 《壯子》의 <田子方 第21>에 나온 말. 공자가 온백설자를 만나보고서 한 마디도 안 하자, 그의 제자 자로가 그 이유를 묻자 ‘저와 같은 사람은 서로의 눈이 마주치기만 하여도 도가 있음을 아니 말로써 나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을 말함.


7) 삼장(三藏): ① 경장(經藏):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문을 모은 경전 ②율장(律藏): 부처님이 제정하신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한 책 ③ 논장(論藏): 경의 뜻을 해석하여 법상(法相)을 논술한 책


(別記) 其爲論也 無所不立 無所不破 如中觀論十二門論等 徧破諸執 亦破於破 而不還許能破所破 是謂往而不徧論也 其瑜伽論攝大乘等 通立深淺判於法門 而不融遣自所立法是謂與而不奪論也 今此論者 旣智旣仁 亦玄亦博 無不立而自遣 無不破而還許 而還許者 顯彼往者往極而?立 而自遣者 明此與者窮與而奪 是謂諸論之祖宗 羣諍之評主也。


그것을 논이라고 한 것은 세우지 아니함이 없고, 타파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중관론>이나 <십이문론> 과 같은 것들은 모든 집착을 두루 타파하고, 또 타파한 것도 타파하면서, 능히 타파한 것(能破)과 타파되어진 것(所破)을 다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을 집착을 없애기(往)만 하고 두루 원만하지 못한 논전이라고 말한다. <유가론>이나 <섭대승론> 등은 깊고 얕은 이론들을 모두 세우고, 법문을 판별하였으나 스스로 세운 법을 융통성 있게 버리지 못했다. 이와 같은 것을 주기만 하고 받기는 못한 논전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 논은 이미 지혜롭기도 하고 인자하기도 하며, 깊기도 하고 넓기도해서 세우면서도 스스로 버리지 아니함이 없고, 타파하면서도 다시 인정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래서 다시 인정한다는 것은 저 없앤 것을 다 없애면 두루 세운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또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것을 다 주게 되면 받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 것은 모든 논의 근본이 되는 종지인 것이며, 여러 논쟁을 평정하는 주인이라고 말한다.

▣ <중관론>과 <십이문론>의 공사상(空思想)


<중관론>과 <십이문론>은 용수가 지은 것으로, 용수의 제자인 제바(提婆)가 지은 <백론(百論)>과 함께 삼론이라고 부른다. 삼론은 주로 공사상을 설명한 논전이다. 용수(龍樹)는 <중관론>과 <십이문론> 등에서 주로 <반야경>에 의한 공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삼론종에서는 공(空)과 가(假)와 중도(中道)를 삼관(三觀)이라고 한다. 용수(龍樹)는 공(空)과 가(假)에 치우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중도(中道)을 설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진 것으로 영원한 실체가 아니다. 형상은 있지만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 중생들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몸을 비롯한 모든 삼라만상은 인연이 모여진 것으로 임시로 존재하는(假)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계속변화되어 가고있으며,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근원인 진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의 근원인 진여심을 믿으면 생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인간의 변화 과정을 생노병사라고 한다면 물질의 변화 과정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표현한다. 모든 물질은 생성 되었다가 머무르고 또 파괴되어 결국에는 형체가 없는 공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천체까지도 성주괴공의 원리에 의해서 생성되어지고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체는 임시로 존재하는 것으로 영원한 존재는 아니다. 불교적 물질론에 있어서는 극미설(極微說)이 있다. 극미(極微)가 모이고 모여서 인간도 되고 천체도 된다. 아무리 커도 분쇄해 들어가면 극미에 도달하고 결국에는 공(空)으로 돌아가서 형체가 없어진다. 형체가 없어진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空)이란 말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공간과 같은 물질의 단위를 말한다. 우리가 허공과 같은 공간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주 공간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러 물질의 입자들로 가득 차 있다. 다른 하나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은 모든 사물이나 정신의 바탕이 되는 대승체를 말한다. 대승체는 이름이나 형상을 초월해서 진리 그대로 존재한다.

공(空)은 이름이나 형상이 없는 진리의 체를 말한다. 형상이 있는 가 유(假有)의 것이 유(有)에 해당한다면, 형상이 없는 공(空)은 무(無)에 해당한다. 우리는 유(有)와 공(空)을 볼 때 치우치지 않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공(空)은 없되 있고, 유(有)는 있되 없다는두 가지 면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관찰할 때 있는 면만 보면 있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없는 면만 보면 아무 것도 없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공(空)과 유(有)를공정하게 관찰하는 것이 중도 사상이다. 용수의 <중론>에서는 중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중도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중도를 인정하면 또 중도에 대한 집착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중도에도 머무르면 안된다고 한 것이 원효대사의 중도론이다. 이와 같은 <중관론>이나 <십이문론> 등은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고 또 타파해서 집착을 없애는데 목적을 둔 사상이다.


▣ <유가론>이나 <섭대승론>의 유가사상(瑜伽思想)

<유가론>과 <섭대승론> 등은 유식사상의 원전이다. 유식사상에 대한 경전은 <해심밀경>이다. 유가론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약칭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은 미륵이 설한 것 을 무착이 정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유가사상(瑜伽思想)은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서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으로 마음의 중요성을 다룬 대승불교 사상이다. 유가(瑜伽)라는 말은 지(止)와 관(觀)을 수행하는 관행을 말한다. 유가(瑜伽)는 요즘 말로 하면 선(禪)이라는 뜻이다. 유가사(瑜伽師)는 선사라는 뜻이다. 유가사지론에는 선사상이 많이 들어있다. 대승불교의 달마선이나 중국선이 유가사지론에 의존해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에서 선정을 만들 때 불이문자(不二文字)를잘못 해석해서 교리와는 관계없이 선사상이 따로 있는 양 생각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중국에서도 교리와 연결되지 않는 선사상에 대해서 비판론이 많이 일고 있다.


<섭대승론>은 대승적인 불교 사상을 전부 모은 경전이다. <섭대승론>은 <아비달마경>에 의해서 무착보살이 엮은 것이다. 무착보살(無着菩薩)은 AD 4세기 경에 유식학을 건립한 분이다. <유가사지론>은 미륵(彌勒)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무착이 지었을 가능성이 많다. 도솔천에 있는 미륵이 밤에만 내려와서 4개월간에 걸쳐서 설한 것이 <유가사지론>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미륵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실제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미륵(彌勒)은 도솔천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저는 <유가사지론>을 무착의 저술로 본다.


무착보살이 저술해서 자기 신앙의 대상인 미륵에게 법공양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효대사는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을 주기만 하고 받기는 못한 논전이라고 한 것이다.


▣ 대승기신론의 사상


이제 이 논(大乘起信論)은 이미 지혜롭고 인자하기도 하고, 깊기도 하고 넓기도 해서 세우면서도 스스로 버리지 아니함이 없고, 타파하면서도 다시 인정하지 아니함이 없다. 모든 사상이나 진리를 세웠지만 세운 것은 세운 것대로 견제하지 아니함이 없고, 타파하면서도 타파한 것을 다시 인정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아무리 찌꺼기라고 해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함이 없다. 썪은 것은 썩은 것대로 진리롭다. 소승적으로 관점으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는 것이 많지만 진리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되면서 쓰레기까지도 오히려 다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쓰레기를 다시 모아 재활용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쓰레기도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한다. 음식물은 음식물대로 폐품은 폐품대로 다시 모아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쓰레기도 다 소중한 재산이다. 그래서 다시 인정한다는 것은 저 없앤 것(往)을 다 없애면 두루 원만하게 세우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없앤다는 것은 저 앞에서 타파한 것에 해당한다. 타파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다시 새롭게 진리를 건립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준다는 것을 다 주게 되면 다시 받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논(大乘起信論)은 모든 논의 근본이 되는 종지인 것이며, 여러 쟁론을 평정하는 주인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종체를 설명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 전체를 총정리 한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사상의 단점과 유가론의 단점을 공정하게 판별해서 불교의 진리를 하나로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오직 이 기신론뿐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사상과 유가사상을 판별하여 진리만을 세운 것은 원효 대사가 아니라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8) 중관론: 용수가 지은 책으로 <중관론(中觀論)>이라고 함. 중론에서는 공(空)과 가유(假有)에 집착하지 않도록 철저히 중도(中道)을 주장했다. 용수가 지은 <중론>과 <십이문론> 그리고 제바가 지은 <백론(百論)>을 합해서 삼론종의 주요경전이 됨.

9) 십이문론: 용수가 지은 책으로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사상을 말한 논전임.


10)유가론: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약칭. 미륵보살의 설법을 무착보살이 엮은 것으로 이 논에는 유가사(瑜伽師)가 행할 열일곱 가지의 경지(十七地)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음.


11) 섭대승론: 무착보살이 지은 책으로 일종의 불교통일론으로 섭론종의 주요경전이 됨.


* 출처/ http://ohmb.co.kr/


* 강의 / 대승불교원 오형근 박사(전동국대 불교대학원장)

 

운주유악( 運 籌 帷 幄 ) | 금비라

http://blog.naver.com/kmbira/150026750572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http://blog.daum.net/mjpark39/16404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