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그 모양만 사라지는 것이지 그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적 에너지는 영원히 멸하지 않고 영생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 색은 현상계의 물질을 말합니다. 색은 즉공이요, 선데 그 공이
허무(虛無)같으면 색즉공 다음에 공즉색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지요. 색즉공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공이 아니라 에너지가 충만한, 시간
공간성을 갖는 질료(質料)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한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 공(空) 가운데서 인연(因緣) 따라서 다시
식(識)이 나옵니다. 물질이 즉 에너지요 에너지가 즉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공 공즉색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를
하신 분들은 그 물리학적인 술어를 말하면 상당히 저항을 느낍니다. 부처님 뜻은 훨씬 깊은데 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일까?
언어나
글은 인간 정도의 식을 갖는 사람들끼리의 극히 제한된 불확실한 정보전달 수단이기 때문에 모두를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어에
걸려버리면 불교는 공부를 못해버리고 맙니다. 언어는 모든 것을 다 정확히 표현을 못하며,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 의미도 달라지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적 술어로 배대를 시키면 그대로 100% 안 맞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맞으면 맞다고 해버려야
합니다. 보다 세밀한 것은 각자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세우면 되겠지요.
아무튼
물질은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것을 일본의 다니구찌 마사하루 사람은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너지의 파동 진동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이것이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천문학(天文學)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보면 우주에는 에너지가
지금 이렇게 충만해 있는데 -에너지를 금진(金塵)이라는 술어로도 사용합니다.- 금진이 무슨 동기가 생겨서 이렇게 좌(左)로 선회(旋回)를 할
때는 하나의 양자(陽子)가 되고, 즉 말하자면 자기(磁氣), 자력(磁力)이 나오고, 금진이 우(右)로 선회(旋回)를 할 때는 전자(電子)가 되고
즉 말로 하자면 전기(電氣)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학설은 금타대화상이 처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실험을 아직 안해봐서 확증은 못합니다만 저는 여러 가지 거기에 부연된 걸로
해서 확신(確信)을 합니다. 그리고 도인(道人)들은 빈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아주 투철한 직관(直觀)으로 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가
없지요. 세세한 문제에 관해서는 다소 언어의 차이 때문에 달리 보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천지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 불교 말로는 일체의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갖춘 순수(純粹)한 하나의 불성입니다.
이
불성을 달리 표현하면 금강륜(金剛輪) 또는 금진(金塵) 그렇게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무슨 동력(動力)이 생기면 금진을 좌나 우로
선회를 시켜서 물질의 근본인 수진(水塵), 화진(火塵), 즉 양성자, 전자 등을 생성시킵니다.
그러면
그 동력은 무엇인가? 동력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희랍 철인 엠페도클레스(BC 500 - 430)는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미움과 사랑' 때문에 물질이 생긴다는 그런 걸로 이론을 정립시켰습니다.
이것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 중생이 무엇을 싫어하면 싫어하는 그 마음이 에너지 기운 동력이 돼서 우(右)로 이렇게 선회(旋回)를 합니다. 우리가 무얼
탐욕심(貪慾心)을 내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그 염력(念力)이 순수한 에너지를 왼쪽으로 선회를 시킵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이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이렇게 좌(左)로 선회를 시키는 것이고, 싫어하는 그 마음은 척력(斥力)이 되어서 이렇게 우로 선회를 합니다. 이와같이 이들이 하나의 함수관계가
돼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나옵니다.
아무튼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법문에서도 하나의 천문학(天文學)에 대해서 우주의 질량, 열량, 그런 것을 모두를 다
수치(數値)로 표시하신 것인데 가장 근원적인 것도 역시 어떻게 해서 물질이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9세기 철인 가운데서 듀포아랜드라는
철인도 삼불가사의(三不可思議), 칠불가사의(七不可思議)를 말하는 가운데서 가장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질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면 굉장한 문제가 되겠지요.
각
철인들이나 과학자들도 여태까지 그렇게 많이 연구하였지만 물질이 무엇인가? 확실히 잘 모른단 말입니다. 마음은 대체로 무엇인가? 또 마음과
물질과는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가? 이 세가지 문제가 인간이 갖는 지혜 가운데 가장 부사의한 의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은 참 성자(聖者)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항상 상대적(相對的)인 것에 머물러 버리기 때문에 상대성을 떠난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런 문제는 인간의 상대적인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알려면 그야말로 직관력(直觀力)으로 해서, 성자의 밝은 안목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직 범부중생의 지위에서는 성자의
가르침을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성능을 갖는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저족 피안(彼岸)은 알 수가 없습니다. 질료가 있는 이쪽 즉 시공(時空)속에
들어 있는 것만 알지 시공을 떠나버린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문제는 아까도 말씀한 바와 같이 희랍의 철인들이나 동양의 철인들이 밝혀 놓은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가 상통(相通)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신 분들은 좋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우주의 순수 에너지가 어떻게 해서 물질이 되는가? 그런 문제는 아직 증명한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증명하시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는 세밀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냥
물지이라는 것은 중생의 업력(業力)의 소치(所致)라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지금
시간들이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이고 도 우리가 이런 기회를 자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아무래도 한 두 시간
동안은 이야기를 해야 할 성싶습니다.
우리
중생의 업력으로 해수 우주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불교 우주론(宇宙論)에서는 우주가 나중에 가서는 텅 비어버린다고 말을 합니다. 우주가 파괴되어서
텅 비어버린다는 것은 지금 물리학도 대강은 말을 합니다. 엔트로피(Entropie), 즉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엔트로피 아닙니까. 지금과
같이 석유나 가스나 원자력 등을 사용하다 보면 마지막에 가서는 사용할 수 없는 열 에너지 찌꺼기만 남습니다. 이렇게 산화가 돼서 불타 버리면
그때는 천지 우주도 다 타버린 셈이 되겠지요, 파괴돼서 텅 비어 버립니다. 우리 불교로 말하면 그 때 괴겁(壞劫)이라.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가 세기고 세길수록 감사하고,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결국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가
성겁(成劫)이라 이루어지고, 또는 주겁(住劫)이라 우리와 같은 생물들이 살고, 생물들이 살다가 차근차근 그때는 우주가 만년(晩年)이 돼서 불타서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때는
텅 비어버립니다. 텅 비면 이제 질료는 조금도 없겠지요. 원자가 있겠습니가, 소립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때는 점이 없단 말입니다.
중성미자(中性微子)도 없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텅텅 비었지만 평등무차별한 공 가운데도 에너지 불변의 법칙은 성립되고 엔트로피는
증장되어 있습니다. 에너지만 남으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일 것인가? 순수 생명인 에너지 그것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 가운데는 무한한
가능성이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성공덕(佛性功德) 아닙니가.
도각스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