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은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조금도 중단이 없지요.
그 몸뚱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인간이 여러 가지 고난도 많이 받고
시비도 많이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몸뚱이를 보배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죄악의 씨앗이 생깁니다. 자기 몸을 보배같이 아낀단 말입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나 기는 것도 몸뚱이를 아끼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여튼 몸뚱이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뻔한 것이고, 영양을 좀 잘먹여
주면 힘이 더 날 것이고, 덜 먹여주면 덜 나오고 하겠지요.
몸뚱이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외피(外皮)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에 애착을 못버리면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절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다같이
고행(苦行)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필요로 요단강 하반 그 광야에서 40일이나 금식기도를 했겠습니까. 밥 한끼도 굶기 어려운 것인데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은 좀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이 몸뚱이 꼭 무슨
칼로리를 얼마를 먹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단식을 해보면 짐작이 갑니다. 월남의 메디콩 스님은 반체제에 저항하던 중 정부로부터
구속당해서 옥중에서 백일 동안을 단식을 했습니다. 옥중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옥중에서 물만 먹고 백일 동안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지내는 것이 아니라 조석으로 두 시간씩 하루 네 시간 염불(念佛)을 했습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 마음 식(識)에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보조에
불과합니다. 영양도 보조에 불과합니다.
저도 40대에 광주 동광사 지도법사로 몇 개월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름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법문을 했었습니다만, 법문에 갈려고 하면 옆에서 만류를 한단 말입니다. 보름동안 단식하고 가서
쓰러져버리면 어쩔거냐고 합니다. 제가 평소에 말더듬이 있습니다만 보름동안 단식하고 나서는 제 평생에 말 한번 처음으로 잘 해 보았습니다. 한번도
말이 더듬지 않고서 잘 나온단 말입니다.
어떤 누구나 단식을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생명 자체 본질은 마음,
즉 식에가 있지 육체에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몸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몸이라. 몸이 건전하면 마음도 건전하고 몸이 취악하면 마음도 취악하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몸은 우리
마음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썹 하나, 치아(齒牙) 하나 모두가 다 우리가 지은대로 생긴 것입니다.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들은 성품을 압니다. 머리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말이 너무나 빗나갔습니다. 우리 마음 이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마음 이것이
우주의 본 바탕이고 우리 인생의 본 바탕이고, 몸 이것은 거기에 한시적으로 50년, 80년 인연 따라서 쓰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에
우리가 너무나 봉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에 너무 지나치게 봉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몸뚱이는 좋고, 남의 몸뚱이는 허수히 여긴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좋으므로 자기 권속인 아내, 남편, 자식의 몸뚱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싸움의 바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종에 불과한 것이고, 다시 말하면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지나친 집착을 안합니다. 지나친 집착을 말라는
이것이 불교의 이른바 고행생활(苦行生活)입니다. 따라서 저희같은 수행자(修行者)는 무얼 만이 먹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옷도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높은 중이 아닙니다. 될수록 골라서 누더기를 입습니다. 가장 못 먹고, 가장 못 입고, 가장 못살면서 정신적인
면만 최고도(最高度)로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이제 출가 수행자의 본분(本分)인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사의지(四依止)라! 가장 알찬 행동
네가지를 보면 첫째 분소의(糞掃衣)라, 우리 옷은 똥 밑씻개나 할 수 있는 그런 누더기를 주어다 깨끗이 빨아 누벼서 옷을 해 입고,
수하좌(樹下座)라, 집 가운데서 자지 말고 항시 나무 밑에서 자고, 상걸식(常乞食)이라, 항시 얻어서 먹고, 얻어서 먹더라도 많이 먹지 말고
주먹밥으로 하나나 되게 먹습니다. 부란약(腐爛藥)이라, 병이 생겼을 때는 길거리의 소똥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만 먹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표본입니다. 그와 같이 청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근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또 집단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절이 생기고 했지요. 그러나 기본 정신만은 잃지를 말아야 수행자가 청빈과 경건한 생활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 이것이 하나의 우주 본체이고, 비록 이렇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의 불성이 그때그때 연 따라서 우로 선회하면 전자가 되고 좌로 선회하면 양자가 되고 그런다 하더라도
전자면 전자, 양자면 양자,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불성이 좌로 진동해서 양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양자, 중성자 그걸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파동이기 때문에 찰나고 머물지 않고
변하고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성 차원에서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순금의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불성 이것은 산소가 되나 무엇이 되나 또는 성분이 되어서 우리 몸을 구성하나 또는 빛도 안나는 쇠뭉치가 되나 무쇠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차원에서는 변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든 것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도 예쁜
사람, 미운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질이 없으므로 불성까지를 볼 수 있는 명확한, 아주 영롱한 안목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다 그때는 하나의 불성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돼도 불성은 변함이 없고, 무쇠가 돼도 변함이 없고, 가사 아주 더러운 똥이 되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여느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한테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똥마른 막대기라! 부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는 그야말로 초월적이고
존귀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물었겠지요. 그런데 운문스님 도인이 보았을 때는 부처는 존귀한 것만이 아니라 똥이나 무엇이나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똥마른 막대기라 했습니다.
이렇게 탁 내 쏘아 버렸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듣는 사람은 부처라는
것은 그렇게 아주 위대한 것인데, 왜 똥마른 막대기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하는 그걸로 해서 마음이 모아집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집중돼서 마음이
트입니다. 마음이 트여서 더욱 집중해서 모아지고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그야말로 확 트이는 것입니다. 확 트이면 그때는 깨달아 버립니다.
그러면 그때는 불성이 훤히 보이니까 똥이나 먼지나 모두가 불성으로만
보이므로 똥마른 막대기를 부처라고 했구나, 그때는 확연히 알 수가 있게 되겠지요. 아무튼 이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물물(頭頭物物),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이것보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 문구는 꼭 외워 두십시오.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오직 우주를 하나의 걸로 딱 통일시켜 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편한
것입니다.
전자(電子)는 무엇이고 양자(陽子)는 무엇이고 또 소립자(素粒子)는 무엇이고
너무나 정보(情報)가 많으니까 죽을 지경인데 다 하나로 모아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나의 걸로 통일시켜 버리면 참 편한 것입니다. 하나의
걸로 통일시키는데 어줍잖은 것으로 통일시키면 사나울 것인데 가장 좋은 불성(佛性)으로 통일시키니 그것이 참 좋지요. 불성 그것은 그렇게 행복도
충만하고, 진여, 법성, 실상, 보리, 도(道), 열반, 극락, 중도, 각(覺), 주인공 다 완전무결한 하나의 불성이므로 그야말로 모두가 다
통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