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一心)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萬有)의 실체(實體)라고 보는 참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우주만법의 수용처이며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동적(動的)인 것이라거나 정적(靜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량(數量)으로 말하여 하나라거나 많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냥 ‘
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되어 있다. 또 일심의 ‘일(一)’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일심으로 어느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으며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다.
이 일심 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고승(高僧)은 신라의 원효(元曉) 스님이다. 원효대사는 대표적인 저서인 대승 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一心)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시켰는데 그 가운데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은 일심을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하여 언제나 참되고 한결같은 본성이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 심진여문이야말로 제법(諸法)의 유일한 근거 로서 지극히 고요하여 모든 더러움이 사라진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참되고 한결같은 진여한 일심이 어떻게 흘러가서 불각(不覺)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떻게 하면 다시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진여(眞如)한 일심은 어느덧 생겨난 충동력인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해서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스스로 진여한 일심을 가리게 되고 차츰 주객의 분별과 이기적인 생각들을 일으켜서 마침내는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심에는 언제나 스스로는 맑게 정화하고 밝음으로 이끌어 가려는 훈습력(薰習力)이 있기 때문에 그 훈습하는 힘이 좋은 계기를 만나면 끊임없이 작용하여 마침내는 본래의 깨달은 상태인 진여로 나아가게 한다는 등의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일심은 온전하고 참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如來藏)으로 무한한 진실성과 덕성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속성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승의 법은 오직 일심(一心)이 있을 뿐이며 일심(一心) 이외에 다른 법은 없다. 단지 무명(無明)이 일심( 一心)을 미혹시켜 육도(六途)에 유전(流轉)하게 하지만, 이 때에도 역시 일심(一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일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세계(六途))를 지어 내기 때문에 널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일으킬 수가 있고, 온갖 세계가 일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몸으로 여겨 일으키는 큰 자비심(同體大悲)>을 낼 수 있는 것이니, 이리하여 의혹을 버리고 발심(發心)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문(二門)을 열은 것은 <여래가 세운 수많은 가르침의 체계들(敎門) 가운데 어떤 것을 의지하여 처음 수행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즉, 비록 많은 가르침의 체계들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이문(二門)에 의해서이다. 다시 말해,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生滅門)에 의지하여 관행(觀行)을 일으켜 지(止)와 관(觀)을 동시에 운용하면 만행(萬行)이 갖추어지는 것이니, 이 이문(二門)에 들어가서 모든 가르침의 체계들을 통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혹을 버리고 수행 길에 접어들 수 있게 된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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