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과 비파사나
남방 불교권에서 들어온 비파사나와 같은 류의 관법들과 인도 쪽에서 들어온 수련법, 그리고 중국에서 들어온 옛 수련법을 비롯하여 또 다른 제 3의 자생적인 수련법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부정관이든 호흡을 살피는 수식관이든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 일종의 관법에 속한다.
관법의 특징이라면, 몸이나 생각의 움직임과 흐름을 따라서 행법을 하는 관계로 쉽게 접근할 수가 있고 느낄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말 눈 밝은 스승이 있어서 활용을 잘 한다면, 번뇌망상을 여의고 눈을 뜨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간접경험을 하고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활용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눈밝은 깨달은 스승을 못 만난다면 그냥 의식의 경계에서 맴돌고 말게 된다.
그냥 그런 저런 경계를 얻은 사람으로부터 배운다면 그저 그렇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오히려 집착을 놓는다고 하면서, 또 다른 집착을 심하게 하거나, 가라앉고 소극적인데 빠지기도 하며, 고요함을 탐닉하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험난한 생각의 파도를 넘어가는 도중에 좌초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일러서 마장에 빠진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마치 장님이 세상의 이치를 듣고서, "어디 한번 알아보자. 하고" 손과 발로 더듬어서 세상을 탐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때론 생사가 둘이 아닌 것 같은 경계에도 들 것이며, 담담하고 편안한 경지도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는 무심하여 세상을 잊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익히고 체험은 될지언정, 눈을 뜨는 것과는 별개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장님이 더듬거려서 수많은 경험을 할지라도, 눈이 원래 밝은 자가 대명천지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근본적인 무지와 집착이 본시 없었음을 익히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쫓아가기 때문에 자칫 알음알이에 빠지는 경향이 생기게 되며, 환상과 환영에 사로잡혀서 마장에 들기도 쉬운 것이다.
헛되이 욕심이 발동하면 그르치기 딱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그 옛날 부처님 재세시에 일부 수행자들이 부정관을 닦다가 사념이 들어서 서로 자살을 도와준 예가 그런 류다.
정신이 명료해지고 맑아지면 현실과 가상이 혼재하게 되는데, 이때 잠재의식 속에 욕심이 발동하면 엉뚱한 상상과 발상에 빠져서 탐닉하기도 하며, 비관하기도 하거나 환희에 빠져서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요하고 무심한데 빠져서 그 속에만 들어 있으려 하기도 한다.
또 생활 속에서 욕심을 내게 되면, 합리적인 판단을 그르쳐서 맹신하기도 하고, 큰 돈을 벌 것 같아서 투기를 하기도 한다.
남방에서 들어온 비파사나와 같은 수행법들은 대체로 가라앉히는 공부 위주로 하는 경향이 있어서, 고요하기는 할지라도 힘이 없으며 자유자재하고는 거리가 먼 수행법이라고 생각을 한다.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거칠고 들뜬 사람은 일차 가라앉힌다면 감을 잡기가 쉽고, 보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단계적인 작용으로 그쳐야 한다고 본다.
좋은 스승이 있어서 상대의 근기를 봐 가면서, 어떤 사람은 힘차게 처음부터 나가게 하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가라앉히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기실 바른 수행이라면 자거나 깨어 있거나, 혹은 거칠거나 고요하거나 간에, 상관없이 수행일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이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정진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다.
혹자는 남방에서 들어온 비파사나나 위빠사나 같은 수행법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실재로 수행하신 수행법이라고 강조를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법들은 대단히 다양해서 어느 한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로 부처님께서도 여러 수행법들을 두루 설렵을 했었기 때문이다.
몰론 부처님께서, 무엇을 새삼스럽게 배워서 깨닫겠는가 만은, 그런 일련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이다.
아무튼 생각으로 일시 감각하고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그러나 단계를 밟아가는 시작 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근본요체는 역시 중도요, 견성성불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경전들이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을 열람 해 보면 대체로 우주 삼라만상과 인과의 이치를 두루 말씀하시고, 또 보시행을 강조하거나, 복을 짖기를 일부 말씀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나갈 것을 주 소재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더욱이, 부처님 자신을 의지해서 복을 빌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복은, 마음을 지혜롭고 평등하게 하며, 서로 주고받으며 이익을 베풀 때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부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면, 그분이 인색하여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수행법은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늘거나 줄지 않는 그대로를 확인하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온전히 완성되어 있는 중도의 행법이다.
이는 단박에 성품이 원만함을 깨닫는 간화선의 목적과도 동일하게 부합된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를 제도하시고 우루빈나 가섭 3형제와 그의 제자들을 제도 할 때를 상기 해 보자. 우루빈나 가섭과 그의 제자들은 여러 행법들을 이미 닦고 익혔으나, 다함이 없는 불멸의 성품을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힘입어서 바로 아라한 과위를 얻게 된다.
그 당시 대다수의 상근기들은 단박에 적멸에 이르러서 아라한 과위를 얻었으며, 중 하근기들은 각자 근기에 순응하여 스승이 제시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수승한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평범한 말씀을 듣고도 바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그런 연 후에 옆에서 모시고 더욱 심화 시켜 나갔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제자들은 여러 가지 수행법들을 단계적으로 행하였다.
그런 수행법들은 경전에 소상히 방법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스승과 제자간에 수련법이 이어져 내려 왔다고 보아진다.
수식이다. 비파사나다. 하는 수행법들은 희로애락, 그리고 모든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각 차원의 정신을 엿보면서 닦아 가는 것이다.
어떤 수행법은 불교 뿐만 아니라 외도들도 가지고 있었고 실천했었다, 마땅히 인도 고대 수행법들의 일부라고 해도 맞는 말 일 것이다.
또 한가지, 남방 소승의 수행법들은 안으로 관찰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현대의 복잡한 삶을 사는 분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고 본다.
자칫하면 세상과 벽을 만들게 된다는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그런 수행법이 그런 대로 무난할 것이나, 현대의 복잡 다난한 사회에서는 걸맞지 않다고 본다.
우리 심층에는 생각이라는 가벼운 의식이 있고 더 깊은 곳에 느낌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느낌들은 정말 천차만별이어서 상상 할 수없이 다양하다.
관법은 이 느낌의 바다를 체험하면서 뛰어 넘어 자유자재한 곳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경계는 대단히 복잡하고 큰 바다의 파도와 같이 험난하다.
출중한 스승의 가르침이 없다면 헤처나가기가 어려을 것이다.
대부분은 중간에 머물고, 착각 속에 공부를 하게 되어 있다.
공부 중에 여러 경계들을 체험을 하게 되는데, 정말 힘들게 공부를 지어가다가 무엇인가 느껴지면 환희하고 대단한 이치나 경지를 얻은 것처럼 착각을 거듭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자면, 공부중에 너도 나도, 대상도 없고 허공과 같으면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래서 공하다. 그랬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좋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말씀하신 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공부란, 어떤 경지를 맛보고 아는 것에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맛보는 것을 지극한 공부라고 말을 한다. 간화선을 하는 이들도 드물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다. 좀처럼 어떤 느낌도 없다가 모처럼 한가닥 홀연히 무엇인지 달라지면, '이제야 나는 깨달았구나. 하고' 환희 용약한다.
그러나 그 것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경치 구경 좀하고 마음이 시원한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런가 하면 숙면일여가 되야 한다. 오매일여가 되야 한다. 하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쓴다.
하여간, 끝까지 머리 위에 머리를 달아 붙이려 하면서 공부라고 때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출중한 스승이 있어서 근본 처에 계합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공부를 한다면, 삿되지고 말거나, 욕심으로 얼룩지게 된다고 본다.
이제 간화선을 이야기함에 앞서서 간화선의 발생 유래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간화선은 송대의 오조 법연스님으로 시작이 되고 대혜종고 스님이 집대성을 했다고 혹자는 말을 한다. 대혜종고 스님은 조주 무자를 앞에 내 세우고 천 칠백공안을 골라 뽑아서 펴신 분이다.
공안이란, 마치 통과해야 하는 시험과도 같고 법원의 판례집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생활속에 일어나는 일련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을 하는데, 공부인으로 하여금 육도만행을 하는 것처럼 폭 넓은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 해 주는 지침이 된다.
간화선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이전에, 육조스님이나 마조스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선지식들이 제자들로 하여금, 단박에 함이 없고 얻을 수도 없고 잃어버릴 수도 없는 완성된 천진 성품을 바로 보아, 더 닦을 바도 없으며 또 다른 방법이 필요 없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름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돈오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을 보는 수행을 한다. 지관법을 닦는다. 혹은 잠을 안자고 공부를 한다. 온갖 애를 쓰는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된 대안으로 바로 분별을 놓아서 구함이 없는, 불멸의 자리에 계합하는 공부를 설파 하셨든 것이다.
스승들이 제자를 다루어 깨우치는 과정 중의 일화와 행위들을 모은 것이 공안이 되고 화두가 되었다.
뒤에 대혜스님이 새삼 정리를 하고 강조를 하신 것이다.
간화선의 특징은, 깊이 궁구 해 들어가는 힘은 광대한 것이며 용맹스럽고 걸림이 없다. 또한 넓고 한량이 없어서 옹졸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나 법도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게 한다.
때문에 쓸 때 없는 번뇌망상과 사념이 들어 올 수가 없으며, 욕심과 집착으로 착각하고 딴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 맹수의 왕인 사자가 자기의 길을 똑바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결국 단박에 심요를 깨달아서 부족함이 없는 완성된 상태에 도달하는데 있다.
'지'나 닦고 '관'이나 닦는, '비파사나와' 같은 그저 편안하고 시원한 감각이나 즐기는 작은 공부와는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단밖에 안다. 함은" 대단히 단순한 듯 하지만, 집착이 많고 욕심이 많으며 구하고 바꾸어야 직성이 풀리는 수행자들은, 이를 이해 할 수도 없고 흥미를 가질 수도 없다는 점도 있다.
그들은 자꾸만 나를 바탕으로 얻고 구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다.
때문에 길을 알고 제어할 수 있는 스승을 인연하여야만 한다.
반드시 스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천 칠백공안을 두루 살펴서 육도 만행을 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스승이 옆에 있어서 온전히 거두어 준다면, 전혀 근본 가르침에 대한 정리가 안된 사람일지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옆에 스승이 없다면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고, 공부의 방향을 바로 알아야 하는 작업이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합적인 모습이 장차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재적인 의식과 집착이 방향을 엉뚱한 대로 잡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스승이 옆에 없다면 반드시 부처님이나 조사의 가르침의 방향을 따로 살펴야 할 것이며, 채찍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경이나 어록을 보는 것을 멀리하고 법문 듣는 것을 멀리한다면, 아무리 화두를 들고 간화를 한다 해도 멀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이 옆에 있다면 늘 친근하고 느끼며 말씀을 들어야만 공부의 진척이 있다고 본다.
아무리 정진을 해도 안 되는 이들은 대부분 자기식 대로 판단하고 연구를 해서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면 애를 써도 너무 힘들고 진전이 별로 없게 된다.
비유를 해 본다면, 어린아이는 처음에는 어른의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
다리가 튼튼해지고 길을 잘 알게 되면 그 때는 스스로 가면 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비파사나 같이 느낌의 단계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바쁘던 시끄럽든 험악하든지에 상관없이, 오고 가며 바로 계합하는 도리다.
때문에 신비함이나 삿됨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며, 또한 그런 현상들을 부정하거나 불신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대로 담담하고 여여하다.
결국 구하고 얻을 것이 없음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망상과 도리에서도 다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두 참법을 하는 분들도 자기도 모르게 관법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다고 본다.
주변의 실상을 좀 둘러보는 차원에서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 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 흔히 수행자들이 범하기 쉬운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번뇌망상의 근원으로 보고, 멀리하고 뿌리치며 싫어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며, 한적하고 고요함을 즐겨서 그런 곳을 즐겨 찾아다닌다.
그리고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과 청빈함을 추구하는 것을 공부로 삼기도 한다.
또한 도라는 것, 법이라는 것, 맑고 고요함에 걸려서 그와 상반되는 것을 싫어하고 회피를 하며, 옳고 착한 것을 지향하여, 그 나머지는 멀리 하거나 싫어하고 막아 버리기도 한다.
또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 마음의 욕망을 끊으며, 자신을 바꾸고 업장을 소멸하려 한다.
이러한 견해로는 오랜 세월 무엇인가 얻었다 해도, 괴로움과 망상을 떠날 수가 없고, 이기심과 욕심을 여윌 수가 없으며, 떠나고 멀리 하고자 목표로 세웠든,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본다.
위에 이야기 한 수행의 모습들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고, 수행 초기에는 일부러 권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수행자들의 자세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오래도록 옛 조사들이 꾸짖었든 대목이다.
그러나 그 요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옛날도 그렇지만 지금도 그렇게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이런 견해로 볼 때는, 과학이나 다른 모든 세상의 작용들이 수행의 방해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들 한 태도 '세상을 멀리하라. 말하고' 혹은 과학과 편리함의 폐단만 지적하게 된다.
생각을 해 보자.
시끄럽고 조용한 것을 가리지 않고, 그 본질이 둘이 아님을 알아서 함께 녹아진 것과, 시끄러움을 피하고 조용한 것을 탐구하여 조용한 것에 익숙해진 것과는 천양지차가 나는 것 아니겠는가.
외도들의 무심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심과 말은 같은 같지만, 본질은 다른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심은, 유와 무에 상관이 없고 쌍으로 굴리는 것이며, 생생이 살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끄러움도 조용함도 없는 것이며 샘물과 같이 유용하다.
그러나 외도들의 무심은 시끄러움을 피해서 조용함을 익숙 시키고 지켜 나가는 것이 여서, 마치 고여 있는 물과 같으며 용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언제까지 고요함을 지켜 나갈 것인가.
앉아서 조용하다면 일어나면 깨어질 것이고, 저 천상세계인 무색계 중의 무상처에 들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깨어나서 다른 의식 속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이런 것은 바른 삼매가 아닐 것이며 목표도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외도다." 하고 말씀하셨든 것이다.
무엇을 점차 닦고 바꾸고 소멸하려 한다면 결코 이룰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간화선은 웅대하여, 과학이 발달하거나 퇴보를 하거나 상관이 없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면, 그런 수련을 해서 어디다 쓸 것인가. 그런 힘으로 어떻게 생사에 대적을 할 것인가. 성품을 보아 단박에 해탈에 이르는 돈오문에서 보면 과학이든 종교든 가릴 것도 없으며 특별히 절대성을 둘 대상도 아닌 것이다.
간화선을 하는 사람들이 살펴야 할 대목이 있겠다. 만약 아래와 같다면 간화선의 장점을 결과적으로 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남이 못하는 행위를 보면 부러워하고 그렇게 해 보려고 하며, 저것이야말로 수행이다.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 밤잠을 잊은 지 오래 되고 고무신을 신고 살며, 음식을 하루 한끼만 먹고 있다고 하면, '희유하다. 하고' 수행의 표본으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자리에 눕지 않고 밤낮으로 앉아있으면 '수행을 잘한다. 하고' 흉내라도 내려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분들을 존경하기도 한다.
때론 선지식들이 후래를 위해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강조하기도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모습이 바로 수행이다. 말한다면, '십만 팔 천리나 떨어져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잠 좀 안자는 그런 수행이 머 대단하겠는가.
육조대사나 다른 큰 조사들이 잠 안자고 안 먹으며 가난한 것을 공부라고 말한 적이 어디 있는가.
앉아서 고목처럼 버티는 것을 또한 공부라고 장려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앉아서 공부가 된들 앉은 공부를 어디에 쓸 것인가. 공부는 앉고 서고 눕고에 관계없이 공부여야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한 발짝만 나가도 혼란할 것이며 옆 사람과 대화만 해도 순조롭지 못 할 것이다.
그런 공부를 해서 어찌 생사에 대적 할 것인가.
시장에 나가서 시끄럽기만 해도 안될 것이다.
그런데도 고요하고 안정된 환경을 추구하는가.
공부를 하는 사람은 세상을 배타하거나 고요함을 추구하지 말아야 공부가 되는데, 공부를 한다. 하면서 세상을 배격하고 고요함만 좇으니, 어떻게 중도를 이룰 것인가.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보겠다.
요즘 보니 시중에 각종 성격의 수련원이 많이도 생겼지만, 절에서도 수련회도 하고 선방이 개설이 되어서 신도들에게도 참선을 시킨다. 그런데 절에서 하는 수련회가 오히려 쇠퇴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 그럴까. 원인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생업에 바쁜 신도들을 불러다 놓고 참선을 시키고, 어쩔 때는 용맹정진도 시킨다.
처음에는 혹시나 해서 긴 시간이라도 참여해서 해 보지만, 결국 계속 할 수는 없게 된다.
그렇게 하면 생업을 유지 할 수도 없고 괴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민선방에는 노인들만 모이게 되었다.
한편 선방에 앉아라도 본 사람은 참선하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까닭이라면, 노력만큼 얻은 이익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모습은 한국 불교의 수행풍토를 좁게 만들고, 신도들이 그저 기도에나 매달리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을 한다.
적절히 가르치는 사람도 없이 무조건 앉혀놓고 참선이라고 마구 시키니, 될 턱이 없고, 참선을 너무 어렵게만 만들어 버려서 그렇다고 본다.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는 영역으로 말이다.
결국 능력있는 스승이 없어서, 참선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과.
선을 아주 어렵고 드높은 경지로만 만들어서, 사람들이 물러나게 했다는 것.
앉는 것만 강조하고 떠나고 버리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보시를 하거나, 일정 부분 기여를 하면서 공부하는 풍토를 만들어 주지 않아서, 선의 저변 확대에 실패를 했다는 것이다.
실 예로 큰 선지식 처소라는 곳에서도 제나 염불, 그리고 기복이 아니면 절이 유지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다른 절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마당에 신도들 더러 주지스님들이 공부하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강조하는 것은, 염불하고 복이나 빌라고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부분은 장차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위기가 돨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불자라면 께달음에 이르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마땅하고, 법을 닦고 베푸는 것을, 최우선하여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을 밖으로 빌어서 얻고, 적당하게 모면해 보려는 마음가짐을 불교인의 자세가 아니건만, 일부에서는 그것이 불교로 각인이 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줄 알아야한다. 또 버려야 할 것으로는, 공부인들도 영험을 얻어서 공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지도자는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인 참구를 위한 법문을 자주하고, 어록을 강의해서 수행자를 다져 주어야만 공부를 놓치지 않고 진전이 있을 것이다.
'화두만 열심히 들라. 하고' 방치를 한다면, 수행자는 자기 고정 관념의 포로가 되어서, 의식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만 쓰느라, 결코 진전이 없게 될 것이다.
더불어 동참하고 분위기를 만들며 이끌어 주어야만 한다.
간화선이 면면히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다시 옛 선지식들의 활달자재한 법을 살려서,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발심을 한 사람이라면 크게 끝없는 마음을 내어서 기필코 어떤 난관이 닥쳐오더라도, 설령 밥을 굶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일은 제쳐놓고 깨닫고 말겠다는 서원과, 남과 더불어 이 길을 같이 가겠다는 원을 새워야 할 것이며, 반드시 인연 있는 선지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때 마음이 담백하고 상이 없다면 좋은 스승을 만 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름만 높고 허명만 날리는 실력 없는 스승을 만날 것이다.
마땅히 인연 있는 스승을 만났다면, 스승을 늘 가까이 친근하고,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정신을 기울여서 온몸으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음 흐름과 호흡까지도 같이 느끼는 정도로 해야, 겨우 공부 길에 나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늘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스승의 법문을 가까이하고 듣고 보고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났다면 되도록 다른 글이나 법문은 잠시 동안은 보고 듣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는 마땅히 스승은 수행자들에게 폭넓은 지식도 제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수행자로 하여금 옹졸하고 편협 되게 만들어 버려서, 공부도 장애가 되지만 생활에 지장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면 다른 법문도 듣고 글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 열거한 마음가짐은 스승의 설법을 들을 때도 해당이 되지만, 법문이나 다른 어록을 볼 때도 해당이 된다. 첫째 둘째도 마음을 비워야 한다. 모양을 정하지도 말고 법의 이치를 스스로 정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한가롭고 자유롭게 가지고 그리고 순수하게.......
보고 듣고 또 몸으로는 느낌을 받아 드린다. 잘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속적이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마음에서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자기 자신을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않는다면 점차 다가 올 것이다.
어떤 집착도 공부에는 장애의 요소 일 뿐이다. 선과 악을 통 털어서 말이다. 심지어는 경과 어록, 그리고 천 칠백 공안까지도 말이나 글을 붙들고 고집을 하고 있으면 장애가 된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오면 부처님도 치고 조사가 오면 조사도 친다는 말이 있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지 그것 아니면 안되고 이것이 최고다. 는 환상이나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란 다른 것이 아니고 스스로 붙잡고 집착하는 것이 마가 된다.
부귀영화가 유한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난 과거세에 얼마나 많은 난관을 지나 왔으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과 싸워야 하는가. 가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윤회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고 겨워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 할 것이다.
반드시 근본을 밝혀서 미망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공부를 지어 갈 때는 결단코 내면의 힘만 길러야 한다.
밖으로 생각을 날려 대상을 두고, 잘된다. 안 된다. 혹은 이익이 있다. 손해다. 혹은 좋다. 싫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 어떤 것도 양면으로 분석하고 보지 않아야 한다.
생각을 놓으려 할 것도 없고, 마음을 쉴 필요도 없다. 다만 양면으로는 생각하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말아야하며, 그렇게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부든 아니든 알 바 없이, 일단 그렇게 하는 습관이 들어야한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일반 사회인들이라도 공부를 떠나서도 새삼스럽게 세상이 다시 보이고 복이 생기고 생활이 부드러워지며, 지혜가 나는 것이니 만큼, 소홀하지 말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 길에 전념이 안되고, 이익을 논하게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휩쓸린다.
다음으로 드러나는 생각이나 느낌은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말아야 한다.
공부를 하다 보면 민감해지는 수가 있어서 흘려 보내는 것이 습관화 되야 한다. 무슨 생각이나 느낌이라도 흘러가는 물처럼 놓아두어야 한다.
굳이 상대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령 희유한 느낌이 와도 마찬가지다. 별 것 아닌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몸도 세상도 미련이 없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만약에 스승의 법문과 가르침 가운데서 화두가 성립이 되었다면, 오로지 화두를 챙기고 온 몸으로 잡아 들어가야 한다. 가장 명료하고 힘차게 말이다.
다만 은근히 지속적으로 할 뿐이다. 그리고 넉넉하고 여유있는 큰 마음으로 해야 한다. 편안하고 나약하게 할 필요는 없다.
화두를 들 때는 뜻이나 알고 이치를 밝히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경계를 보려고 해도 안된다.
화두는 보고 듣고 느끼며 아는데 있지 않다.
그렇게 힘차고 끊임없이 지어가되, 때때로 스승의 다그침과 조절을 받아야한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수행자가 아직 화두를 잡을 수가 없을 때는, 스승은 단계적인 방편을 베풀어야 할 필요도 있으며, 그러한 준비가 충분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통이 커서 우주를 다 살릴 수도 있고 우주를 다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또 마음에 응어리는 무엇이든지 처 버려야 한다.
아무리 잘못한 과거라도 이미 깨끗한 것이니, 마음에 둘 것이 없으며, 아무리 잘한 일이라도 별 것 아니니, 한 순간도 두지를 말라.
그리고 열등의식과 자존심은 둘이 아니니, 둘 다 처 버려야한다.
사실은 처 버린다 해도 처 버릴 것이 없다. 본질이 무상하고 무주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처 버릴 것인가?
무엇을 놓을 것인가?
과거는 지나지 않았으며, 미래는 오려야 오지 않는다.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자리며 얻으려야 얻을 수가 없는 자리임을 알아야한다.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놓으면 몸의 기결이 풀리면서 한 층 정진하는데 쉬어지고 주변이 풀린다.
믿어지든 안 믿어지든, 이익이 있든 없든 일단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화두를 잡아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화두를 드는 자는 반드시 몸의 균형을 이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온몸으로, 생각으로, 느낌으로, 화두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몸의 어느 곳에도 집중을 하면 안된다. 그리고 한없이 여유있고 느긋하며 지속적으로 화두를 들어야한다.
그냥 생각으로만 화두를 들면 반드시 머리나 가슴에 열이 모여서 병이 된다. 급하게 용을 써도 마찬가지다.
요체는 여유있고 느긋하며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들며 몸에는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드는 사람은 생명이 다 하도록 결단코 이 길을 가고 성취하리라는 각오로 정성스럽게 그리고 간절하게 화두를 들어야한다.
간절하게 하라고 하니 급하고 서두르라는 말이 아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그리워 하듯이 하면된다.
그러다 만약 답답하면 가슴의 힘을 풀어 놓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포근해 진다.
간화선은 조사선의 바탕에서 빛이 난다.
결국은 조사선으로 가는 것이며 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옛 고인들이 머리 좋은 자들을 위해 격외 도리를 마구 쓰다 보니 화두와 언어가 아름답게 치장되고 꾸미는 것으로, 또 그걸 풀어 대는 것으로 화두가 변질되면서 조사선도 죽고 간화선도 죽게 되었다.
화두는 결코 이치를 알고 뜻을 알려는 대 있지 않다.
처음부터 일체의 근본을 확인하고 눈 녹듯이 모든 응어리가 녹아져 들어가는데 있어야 한다.
이렇게 윤회를 이르키고 '나'라는 것을 세우는 그 주체가 과연 무엇인지? 또 그것이 들어나고 녹아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화두를 알고 풀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어쩌면 한 자루 녹쓴 호미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는 수준으로 끝을 내려고 한다.
마무리 삼아서 제삼 강조하고 덧 붙이고자 하는 의견이 있다.
대학에서 교수들이 연구와 강의를 겸하고 있다. 연구와 강의는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깊이 연구가 되어 있어도 상대방의 근기와 심리를 살펴서 응어리를 제거하고 자신의 연구를 깊게 흡수하게 하는 지도력은 다르다는 말이다.
설령 연구가 깊어도 그런 방면의 훈련과 마음가짐 그리고 준비가 덜 되어 있다면 결코 학생들의 눈을 열어 줄 수가 없을 것이며 성적을 올릴 수도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자기가 닦는바만 고집하여 남을 가르치려 한다면 바로 맥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 만큼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은 막중하여, 스스로 대오 각성하여 얻은 만큼 남에게 전수할 능력도 길러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에 스승들이 없지 않건만, 후학들이 늘 친근하고 가르침을 청하지 않는 풍토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 동안 면면히 수행자들이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어갔다면, 이렇게 선지식을 외면하는 풍조가 일어 났겠는가? 반드시 스승은 스승으로써 지도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개선점에도 불구하고, 요즘 새롭게 활발하게 간화선의 종풍을 드날리며, 선풍을 진작시키고 있는 젊은 스님들이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다.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매우 희망적이라고 본다. 그런 조짐들을 볼 때, 상당히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분들이 나올 것이니 만큼, 장차 이 땅에 간화선의 꽃을 피우기 바랄 뿐이다.
끝으로 결코 간화선만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법계가 두루 통하여 무상한데 절대적인 법은 있을 수가 본래 없는 것이다.
간화선이 아무리 좋은 장점이 있다해도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실천한다면 죽은 송장 붙들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밝은 스승이라면 다른 법중에 무엇을 활용 한들 탈이 있겠는가.
종교도 법도 시시때때로 변천하고 가만이 머루르지 않는다 절대적이란 있을 수가 없다.
사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다양한 법을 응용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어렵고 힘들게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달마대사나 육조대사도 마찬가지다.
매우 간결하고 밝아서 차레를 뛰어넘어 바로 깨닫게 하셨든 것이다.
돈오란 즉시 스스로 완성된 자리에 임하여 절대평등속에 시공을 뛰어 넘는 것이다.
즉 잃고 얻음도 없으며 구할바도 없고 의문도 끊어져서 무엇을 얻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스승이 제자와 기틀이 합해서 제자는 쉽게 녹아지는 것이다. 물론 스승도 훌륭하고 제자도 영특했다고 치부 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랬든 것이다.
돈오는 모양을 만들고 계급을 넘어서 바꾸고 얻는 그런 수행이 아닌 것이다.
이는 후기의 간화선과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것이며 굳이 이름을 붙힌다면 조사선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조사선을 바탕으로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간화선이 있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간화선은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막연히 문자에 의지한다면 안될 것이며.
후기의 간화선의 병폐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출처: 마하수련원--벽공스님의 생활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