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육조단경 지침(指針)
서언
「단경(壇經)」은 육조(六祖)의 법손인 동토(東土) 선종의 근본이 되는 성전(聖典)이다. 「단경」은 전래되는 과정에서 다른 본(本)이 많이 나와 학자들을 곤혹케 하였으나, 돈황고본(敦煌古本)이 발견되어 천고의 의심이 해결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리하여 근래 일본의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선종사연구회(禪宗史硏究會)에서는 그 중 기본이 되는 다섯 본을 서로 대조하여 「혜능연구(慧能硏究)」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단경연구에 공헌하였다.
다섯 본은 돈황본(敦煌本), 대승사본(大乘寺本), 흥성사본(興聖寺本), 덕이본(德異本), 종보본(宗寶本)이다. 또한 열두 종류의 다른판(版)들을 영인 수록한 「육조단경제본집성(六祖壇經諸本集成)」도 좋은 자료이다. 이에 가장 오래된 돈황본을 중심으로 네 본을 서로 대조하고 다른 여러 본을 참고하여 「단경지침(壇經指針)」을 작성하여 보았다.
돈황본을 베껴 쓸 때 부주의하여 글자를 잘못 쓰거나 빠뜨린 것이 많으나, 다른 본들을 참조하면 성의(聖意)를 파악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다. 각 본의 자구(字句) 차이는 대강의 뜻만 취하고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았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단경」의 근본 사상은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이요, 식심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인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쳐 밝음)이어서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 곧 성불(成佛 부처를 이룸)이므로, 깨달은 뒤[悟後]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修行佛行]고 분명히 하였다. 뒷날 교가(敎家)의 점수사상(漸修思想)이 섞여 들어와 오후점수론(悟後漸修論 깨친 뒤 점차로 닦는다는 이론)이 성행하나, 이는 「단경」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육조대사의 법손인 선가(禪家)는 「단경」으로 되돌아와 육조대사 본연의 종풍을 떨치기 바란다.
1. 식심견성(識心見性)
모든 법이 모두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서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하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一切萬法이 盡在自身心中이어늘 何不從於自心하야 頓現眞如本性(姓)고 菩薩戒經에 云我本源(願)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自成佛道라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敦 316
만법이 모두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서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지 못하는가? 「보살계경」에서 말하기를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식심견성하면 다 부처님 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곧 활연히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萬法이 盡在自心이어늘 何不從自心中하야 頓見眞如本性고 菩薩戒經에 云 我本源自性이 淸淨이라하니 識心見性하면 皆成佛道라 卽時豁然하야 還得本心이로다-大.興.德.宗 316
○앞의 인용문은 돈황본이요, 뒤의 인용문은 대승사본·흥선사본·덕이본·종보본이니, 돈황본을 중심으로 하여 네 본을 참조하였다. 네 본이 더러 자구의 차이는 있으나 그 근본 뜻은 같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이 맑고 깨끗함)'은 「보살계경」의 말씀이요. '식심견성'은 육조의 말씀이요, '즉시활연(卽時豁然 즉시에 탁 트이어 깨침)'은 「유마경」의 말씀이다. 두 경의 글을 인용하여 육조 자신의 법문인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한다[識心見性 自成佛道]'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니,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하였다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云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어늘 不能自性悟어든 須得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에 있어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므로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였다면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바야흐로 성품을 볼지니라.
三世諸佛과 十二部經이 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ㅓ늘 不能自悟어든 求善知識示導하야 方見이니라 -大.興.德.宗 317
○스스로 오달(悟達 깨쳐 통달 함)하지 못하면 선지식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깨닫게 하되,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各自觀心하야 令自本性을 頓悟하되 若[不]能自悟者는 須覓大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317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白)有之어늘 卽緣心迷하야 不能自(白)悟하니 須求大善知識示導(道)하야 見性이니라 -敦 292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스스로 가졌거늘 다만 마음이 미혹하므로 스스로 깨칠 수 없으니, 반드시 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성품을 볼지니라.
菩提般若之智는 世人이 本自有之어늘 只緣心迷하야 不能自悟하나니 須求大善知識示導하야 見性이니라 -大.興.德.宗 292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없어지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人性(姓)은 本淨이로되 爲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離妄念하면 本性(姓)이 淨하니라 -敦 298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다만 망념이 없으면 본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니라.
人性은 本淨이로되 由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但無妄想하면 性自淸淨이니라 -大.興.德.宗 298
○망상이 소멸하면 본래로 청정한 자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이것이 식심(識心 마음을 앎)이며 견성이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라.
識自(白)本[心]이 是見本性이니라 -敦 295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느니라.
自識本心하고 自見本性이니라 -大.興.德.宗 295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불법을 배워도 이로움이 없으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큰 뜻을 깨치느니라.
不識本心하면 學法無益이니 識心見性(姓)하면 卽悟(吾)大意니라 -敦 284
○'큰 뜻[大意]'이란 돈황본 윗글에서 '큰 뜻을 알면 곧 의발을 부촉하리라[識大意하면 卽付衣鉢하리라]'고 한 그 '큰 뜻'이다.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敦312
앞 생각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 생각이 깨치면 곧 부처니라.
前念이 迷卽凡이요 後念이 悟卽佛이니라 -大.德.宗 313
○흥성사본에는 이 구절이 빠지고 없으나 상관은 없다. 이는 돈오견성(頓悟見性 단박에 깨쳐서 성품을 봄)이 곧 성불임을 말한 것이다.
자성(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佛卽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衆生이 卽佛이니라 -敦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미혹을 떠나면 곧 깨달음이니 깨달으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離迷卽覺이니 覺卽是佛이니라 -大 315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卽是佛이니라 -大.德.宗 325
○불(佛)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이며, 십지(十地)·등각(等覺)도 미혹중생이니, 정오정각(正悟正覺 바르게 깨치고 바르게 깨달음)이 아니다. 식심견성은 정오정각을 말함이니, 그것은 구경묘각 이라야 한다.
2 . 내외명철(內外明徹)
무엇을 청정법신불 이라 하는가? 세상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만법이 다 자기의 성품 가운데 있으니, 모든 법이 다 자기의 성품에 있어서 자기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니라.
해와 달이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다가, 문득 지혜의 바람이 불어와서 구름과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 버리면 온갖 것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성품이 청정함도 마치 깨끗한 하늘과 같으며 혜(惠)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아 지혜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기의 성품이 밝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참다운 법을 열어 주시는 선지식을 만나 미망(迷妄)을 없애 버리면 내외 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일체법에 자재 하나니, 청정법신 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淸淨<法>身佛 世人 性本自淨 萬法 在自性(姓) 一切法 盡在自性 自性 常淸淨 日月 常明(名) 只爲雲盖覆 上明(名)下暗 不能了見日月星(西)辰 忽遇慧風 吹散 卷盡雲霧 萬象森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智如月 智惠常明(名) 於外 着境(看敬) 妄念浮雲 盖覆 自性(姓) 不能明(名) 故遇善知識 開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名)徹 於自性(姓)中 萬法 皆現 一切法 自在性(姓) 名淸淨法身-敦 三百二(29)
무엇을 청정법신이라 하는가? 세상 사람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모든 법이 모두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나느니라.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 가운데 갖추어 있으니 하늘이 항상 맑음과 같으며, 해와 달이 항상 밝되 뜬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가 문득 바람이 불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면 위아래가 함께 밝아서 모든 모양이 다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의 성품이 항상 떠돌아다님도 저 구름 낀 하늘같아서 또한 그와 같으니라. 지(智)는 해와 같고 혜(慧)는 달과 같아 지혜(智慧)가 항상 밝거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서 자성이 밝고 맑지 못하다가, 만약 선지식을 만나 참된 법을 듣고 미망을 스스로 없앤다면 내외 명철하여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나나니, 성품을 본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이를 청정법신불 이라고 이름하느니라.
何名淸淨法身 世人 性本淸淨 萬法 皆從自性生 諸(30)法 在自性中 如天常淸 如日月 常明 爲浮雲 盖覆 上明下暗 忽遇風吹 衆雲 散盡 上下俱明 萬象 皆現 世人性 常浮遊 如彼雲天 亦復如是 智如日慧如月 智慧常明 於外 著境 被妄念浮雲 盖覆 白性 不得明朗 若遇善知識 聞眞法 自除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 皆現 見性之人 亦復如是 此名淸淨法身佛-大.興.德.宗 三百二(31)
* 만법의 근원인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덮은 망념의 뜬구름을 다 흩어버리면 우주의 위아래와 몸과 마음의 안팎이 확연명철(廓然明徹 툭 트이어 사무쳐 밝음)하여, 깨끗한 유리병 속에 밝은 달을 담은 것과 같다. 내외명철을 <영락경(瓔珞經)>, <능엄경(楞嚴經)>에서는 구경묘각(究竟妙覺)이라고 하였으며, 육조는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였다. <천태사교의 원교장(天台四敎儀圓敎章)>에서는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였다.
"미세한 무명(無明)을 나아가 부수고 묘각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명의 부모를 영원히 이별하고 구경의 열반산정에 오르니 대열반이라 이름하는지라, 청정법신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 언제나 고요한 광명 세계)에 사니, 곧 원교불상(圓敎佛相 원교의 부처님 모습)이니라[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야 永別無明父母하고 究竟登涅槃山頂하니라 名大涅槃이라 成淸淨法身하야 居常寂光土하니 卽圓敎佛相也니라]."
자재보살(自在菩薩)들이 오매일여(寤寐一如 자나깨나 한결 같음)는 되어도 구경묘각을 실증(實證)하지 못하면 '내외명철'의 경지는 되지 못하니, 이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극심심처(極甚深處 지극히 깊은 곳)이다.
동황본에는 '견성한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見性之人도赤復如是라]'는 구절이 빠졌으나, 망념이 없어져 만법이 모두 나타난 청정법신불이 곧 견성이므로 상관이 없다. 이로써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자기 성품의 심지(心地 마음자리)를 지혜로써 관조(觀照 비추어 봄)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요,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八(34)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며 무념이니라.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
*앞 항(項)에서는 내외명철이 청정법신불이라 하였고, 이 항에서는 내외명철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 해탈, 반야삼매(般若三昧), 무념(無念 생각 없음)이라고 하였다. 식심은 곧 견성이므로, 견성은 법신불(法身佛)이며 반야삼매며 무념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곧 견성을 하여서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卽得見性 入若三昧-敦 三一四(35)
*견성은 곧 반야삼매임을 말한다.
육진(六塵) 속에서 여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 감에 자유로움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敦 三一八
육진 속에서 물들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아서, 가고 옴에 자유로우며 널리 사용하여도 걸림 없음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大.德.興.宗 三一八(36)
*식심, 견성, 해탈, 무념, 반야삼매 등은 모두 법신불이며, 묘각인 내외명철임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이는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말함이니, <기신론(起信論)의 '구경각 즉 견성(究竟覺卽見性)'과 같은 말이다. 육조는 '견성이 곧 성불'임을 이렇게 소상하고 정확하게 말씀하였으므로, 견성하여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한 뒤에 성불한다는 것은 육조의 정통 사상이 아니니, 이러한 주장은 육조의 정전(正傳)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3.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조(五祖)가 <금강경>을 강설하심에 혜능이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치니라. 그 밤에 법을 받으니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문득 돈법(頓法)과 가사를 전하며 '너를 육대조(六代祖)로 삼는다'고 하였다.
五祖說金剛經 惠能 一聞 言下 便悟(伍) 其夜 受法 人盡不知 便傳頓法 衣 汝爲六代(伐)祖-敦 二八五
*이는 오도전법(悟道傳法 도를 깨치고 법을 전함)을 대강 서술한 것으로 돈법은 돈오법(頓悟法)이라는 말이다.
말끝에 모든 법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음을 문득 깨닫고 내가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 없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으며, 어찌 자성이 움직임이 없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요!"
오조스님은 내가 본래의 성품을 깨쳤음을 아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본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느니라. 만약 말끝에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아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인천의 스승, 부처[人天師佛]'니라."
삼경(三更)에 법을 받으니,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곧 심인(心印)의 돈법과 의발(衣鉢)을 전하고, '너를 육대조사로 삼는다'고 하였느니라.
言下 便悟一切萬法 不離自性 某甲 啓言 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無動無搖 能生萬法 五祖知悟本性 乃報某甲(38) 言 不識本心 學法無益 若言下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名人天師佛 三更 受法 人盡不知 便傳心印頓法 及衣鉢 汝爲六代祖-大.興.德.宗 二八五(39)
*이는 돈황본보다 상세하다.
대승사본의 '모갑(某甲)'과 돈법(頓法)]을 다른 본에서는 각각 '혜능(慧能)'과 '돈교(頓敎)'라고 하였다. 돈법은 돈오법문(頓悟法門)이요, 돈교는 돈오교시(頓悟敎示)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다.
'하기(何期)'이하는 깨친 법[悟法]의 내용인데, 오조가 인가(印可)하며 말씀하시기를 식심견성하면 곧 이름이 '인천의 스승, 부처'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식심견성하면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임을 선언하였으며, 지위(地位)와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는[一超直入如來地] 돈오법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견성하면 내외 명철인 묘각불지(妙覺佛地)임을 말한 것이니, 불지가 아닌 삼현(三賢), 십성(十聖)은 모두 견성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오직 돈교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頓敎法 出世破邪宗-敦 三二七
오직 견성법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와 삿된 종을 부수는도다.
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大.興.德.宗 三二七(41)
*돈황본에는 돈교법(頓敎法)이라 하고 다른 본에는 견성법(見性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교가(敎家)의 돈교가 아니요 선문이 '견성돈오교법'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견성법이 곧 돈교이며 돈교법이 곧 견성법이다. <단경>에서 많이 언급한 돈교는 견성하는 돈오교시(頓悟敎示)이다.
대사가 이 돈오교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같은 한 몸이기를 바라노라.
大師令傳此頓敎 願學之人同一體-敦 三二十
우리 조사가 오직 이 돈법을 전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같은 한 몸이기를 바라노라.
吾祖唯傳此頓法 願學之人同一體-大.德.興.宗 三二十
*조조상전(祖祖相傳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함)은 견성하는 돈오교법뿐이다.
이는 다만 돈교라, 또한 대승(大乘)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할 때는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但是頓敎 亦名爲大乘 迷來經累劫 悟卽刹那間-敦 三二九(42)
이 게송은 돈오 법문이요 또한 큰 법의 배[大法船]이니, 미혹하여 들으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지만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此頌 是頓敎 亦名大法船 迷聞經累劫 悟則刹那間-興.德.宗 三二九(43)
*여러 겁을 잘못 헤매다가도 찰나 사이에 오달하므로 '돈(頓)'이라고 한다. 육조의 법문은 유돈무점(唯頓無漸 오직 '돈'만 있고 '점'은 없는 것)이어서 돈오하면 곧 바로 불지에 들어가[直入佛地] 지위, 점차를 없애는 것이 <단경>의 근본 방침이니, 육조는 이를 '직료성불(直了成佛 당장 성불해 마침)'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오조인(五祖忍)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고 말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다. 그러므로 이 돈법을 뒷날에 널리 퍼지게 하여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케 하여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의 본성을 단박에 깨치도록 하는 것이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大悟(伍) 頓見眞如本性 是故 將此(汝)頓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性 頓悟-敦 三一七
*돈견본성(頓見本性 본성을 단박에 봄)과 돈오보리(頓悟菩提 보리를 단박에 깨달음)는 같은 뜻이니, 이것이 육조의 돈교법문이다.
내가 오조스님 밑에서 한 번 듣고 말 끝에 문득 깨쳐 진여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 이러므로 이 교법이 널리 퍼져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를 돈오하여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살펴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게 하느니라.
我於忍和尙處 一聞 言下 便悟 頓見眞如本性 是以 將此敎法流行 令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自見本性(44)-大.興.德.宗 三二七
*다섯 본이 표현에 있어 자구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근본 뜻은 같으므로 상관이 없다.
법에는 '돈'과 '점'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차츰차츰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 깨치면 원래로 차별이 없느니라.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明)漸契(勸) 悟人 頓修 識自(白)本<心> 是見本性 頓卽元無差別-敦 二九五(45)
*'明'은 각 본에 '迷'로, '勸'은 '契'로, '本'은 '本心'으로 되어 있으므로, 잘못되고 빠진 것이 분명하여 바로잡는다. 오인돈수(悟人頓修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음)는 분명하게 있으므로 식심견성이 곧 돈수임을 말한다. 그리고, 깨달은 뒤에는 영리함과 어리석음[利鈍]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으니,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면 곧 차별이 없느니라.
迷人 漸契 悟者 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大.興.德 二九五(46)
*종보본에는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닦고 깨친 이는 단박에 계합한다[迷人漸修悟人頓契]>로 되어 있으나, 근본 뜻은 앞의 항목과 같다.
"청하오니 대사의 세우지 않는다[不立]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는 말씀하였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어서 생각 생각이 반야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으니 무엇을 가히 세우리요. 자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느니라."
請大師 不立 如何 大師言 自性(姓) 無非無亂無痴 念念般若觀照 常(當)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契)以不立-敦 三三八(47)
"어떤 것이 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자성은 잘못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어지러움도 없어서 생각마다 지혜가 밝게 비춰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나서 자유자재하여 거침이 없으니 무엇을 세운단 말인가?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음)하여 점차가 없느니라."
如何是不立義 師曰自性 無非無痴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大.興.德.宗 339
*식심, 견성, 대오(大悟), 돈오는 원해 묘각인 내외명철을 내용으로 한다. 그리하여 삼현(三賢), 십성(十聖)을 뛰어넘었으므로 돈오돈수라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선(六祖禪)의 근본 사상이다. 그러므로 돈법, 돈교로써 일체의 점문(漸門)을 배제한 것이다.
마땅히 반야로 관조하면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져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선지식이라,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을 아느니라. 자기의 성품의 마음자리에 지혜로 관조하여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요 곧 해탈이니라. 이미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니,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當起般若觀照 刹那間 妄念 俱滅 卽是自眞正善知識 一悟 卽知佛也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班若三昧 卽是無念-敦 三一八(49)
반야지혜가 일어나 비추면 한 찰나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지나니,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한 번 깨침에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르느니라. 지혜로 비춰서 내외명철하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나니,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요, 만약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니, 이것이 무념이니라.
起般若觀照 一刹那間 妄念 俱滅 若識自性 一悟 卽至佛地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大.興.德.宗 三一八(50)
*돈황본에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을 안다[一悟知佛]'고 하였고, 각 본에서는 '한 번 깨침에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一悟佛地]'고 하여 표현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반야로 관조하여 망념이 다 없어지면 내외명철하여 불지[佛地 부처님의 지위]가 아닐 수 없으므로, '부처님을 안다[知佛]'함은 곧 '부처님 지위[佛地]'인 것이다. 또한 네 본에서 '만약 자기의 성품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하면卽至佛地]'고 한 것은 '식심견성'이 곧 부처님 지위임을 육조가 친히 말씀한 중요한 법문이니, 식심 견성하면 묘각(妙覺)인 내외명철임을 더욱 더 뚜렷이 하였다.
법달이 말끝에 크게 깨치고 말하기를 "이후로 생각 생각 부처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하니,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하였다.
法達 言下 大悟 自言 已後 念念修行不行 大師言 卽佛行 是佛-敦 三四五(51)
*대승사본에는 '부처님 행 닦기를 원한다[願修佛行]', 흥성사본에는 '바야흐로 부처님 행을 닦는다[方修佛行]'고 하였으나 뜻은 같다. 덕이본과 종보본에는 이 구절이 빠졌으나, 다른 세 본에는 수록되어 있으므로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돈오견성(頓悟見性)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 깨친 뒤에 점차로 닦음)는 필요 없고 부처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는 교가의 점수사상으로 어지럽게 된 종문(宗門)에 일대 활로(活路)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의 세 몸)을 갖추어 밝음을 빛내어 사지(四智 부처가 갖추는 세 가지 지혜)를 이루나니,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느니라.
自性 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德.宗 三五十(52)
*이 항(項)은 뒷 날 덧붙인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돈황본에는 없으나 <전등록> 등에 육조의 법문으로서 많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육조의 법문임을 의심할 수 없는 유명한 구절이다. 돈오견성하면 삼신, 사지를 이루어 초연히 부처님 지위에 오르니[超然登佛地] 오인돈수,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만을 전함)을 항상 주장한 육조의 면목이 뚜렷하다.
4. 무념위종(無念爲宗)
나의 법문은 옛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나니, 모양 없음[無相]으로 몸[體]을 삼고 머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無)宗 無相爲(無)體 無住[無]爲本-敦 二九五
*돈점(頓漸) 두 자는 군더더기임이 밝혀졌으며, 무념무종(無念無宗), 무상무체(無相無體), 무주무위본(無住無爲本)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을 잘못 베낀 것이다.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먼저 무념을 세워 종을 삼고, 모양 없음으로 몸을 삼고 머뭄 없음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此法門 從上已來 先立無念爲宗 無相 爲體 無住 爲本-大.興.德.宗 二九五(54)
*육조의 무념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위의 무념)이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是以 立無念爲宗-敦 二九六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所以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六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敎門 立無念爲宗-敦 二九七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法門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七(55)
*육조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음)을 거듭 말씀하신 것은 육조의 근본 입장이 내외명철한 묘각무념(妙覺無念)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유념(有念 생각 있음)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하느니라. 없다[無]함은 무슨 일이 없다 함이며, 생각함이란 무슨 물건을 생각함인가?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모든 진로(塵勞 번뇌)를 버림이요, 진여는 생각[念]의 몸[體]이며 생각은 진여의 씀[用]이니라.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 하고 항상 자재하나니, <유마경>에 이르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眞如 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姓)起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白)在 維摩經 云 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敦 二九七(56)
*무념은 유무(有無)나 선악(善惡)처럼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를 영원히 여읜 진여정념(眞如正念)을 말한다.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의 씀이니라, (삭제 부분)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모든 물질과 모양[色相]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無者 無二相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卽是念之體 念 卽是眞如之用 (削除部分)眞如自性 起念 念六相 雖有見聞覺知 不染萬境而眞性 常自在 外能分別諸色相 內於第一義而不動-大.興.德.宗 二九七(57)
*이 항은 돈황본과 약간 표현이 다르기는 하나, 진로를 영원히 떠난 진여정념(眞如正念)의 근본 사상은 같다. 중간에 보조(普照)가 발문(跋文)에서 지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眞如自性起念 非眼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 聲當時卽壞-삭제부분) 은 삭제하였는데, 돈황 고본에는 이 부분이 처음부터 없으므로 돈황본의 뛰어남을 알 수 있으며, 삭제 부분은 이 항의 본 뜻인 '진여정념(眞如正念)'을 설명해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 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着 莫起(去) 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敦 三一三(59)
*법을 깨달으면 곧 무념이요,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라,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망념도 없어서 광망( 妄)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의 진여의 성품을 써서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無妄 莫起 妄 用自眞如性 以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大.興.德.宗 三一三
*이 항 또한 돈황본과 표현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큰 뜻은 같다. 법을 깨달으면[悟法] 무념이요 견성성불임을 말하여 준다.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느니라.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敦 三一八(60)
만약 모든 법을 보되 마음이 물들어 끄달리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名無念-大.興.德.宗 三一八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하느니라.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敦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서 일만 가지 경계를 만나서도 마음이 늘 고요하여 생각 위에 모든 경계를 떠나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於諸境上 心若能萬境 常寂 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所以 立無念爲宗-大 二九六(61)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이 무념이라, 자기의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느니라.
於諸境上 心不染曰無念 於自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興.德.宗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고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고 하는 바, 식심견성한 불지무념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니, 불오염(不汚染 물듦이 없음)은 곧 구경무념(究竟無念)을 말한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에 두루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悟無念法者 萬法 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敦.大.興.德.宗 三一八(62)
*이는 옛 조사들이 특히 많이 인용하는 구절로, 육조는 무념이 곧 만법진통(萬法盡通 만법이 다 통함), 제불경계(諸佛境界 모든 부처님의 경계), 불지위(佛地位)이므로, 식심견성하면 내외명철, 불지무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법문은 언제나 한결같아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이 철칙(鐵則)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어긋난다면 육조의 법손이 아니다.
이로써 <단경>의 대강을 알았다. <단경>의 목표는 식심견성이며 식심견성은 묘각인 내외명철이므로, 이를 반야삼매, 해탈, 무념이라고 한다.
이는 점차(漸次)를 밟아 닦아가지 아니하고 당장 성불해 마친다[直了成佛]고 하는 돈수이므로, 육조는 늘 유전돈법을 고창(高唱)한 것이다.
돈법이므로 무념으로 종을 삼아서 모든 망념이 사라졌으니, 제불의 경계인 불지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견성이 곧 성불임을 청천백일과 같이 선설(宣設)하였으며,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修行佛行]하였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육조의 성의(聖意)를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견성하고 차제점수(次第漸修 차례로 차츰차츰 닦음)하여 구경성불(究竟成佛)한다'는 하택(荷澤), 규봉(圭峯)의 점수사상은 교가(敎家)의 전통이요 육조의 사상을 바로 전한 것이 아닌 지해(知解)라고 옛 조사들이 극력 배제한 것이니, 육조의 후손인 우리는 <단경>을 숙독(熟讀)하고 실천하여 삿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여야 한다.
5. 정혜체일(定慧滯一)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이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어서 둘이 아니니, 곧 정은 혜의 몸[體]이요 혜는 정의 작용[用]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 속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 속에 있나니,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定慧別 定慧體一不二 卽定是慧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是 定在惠卽定之時 惠在定 此義 卽是<定>慧等-敦 二九三
나의 이 법문은 정,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 혜가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뜻을 알면 정과 혜가 함께 배움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勿迷言定慧別 定慧一切不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是 慧在(65)定 若識此義 定慧等學-大.興.德.宗 二九三(99)
*함께 배운다[等學]함은 정혜등지(定慧等持 정과 혜를 함께 가짐) 곧 자성삼매(自性三昧)를 말함이요 수도방편(修道方便)이 아니니, <열반경> 28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정과 혜를 함께 하기 때문에 부처의 성품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惠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제불의 자성삼매인 정과 혜를 수행점차(修行漸次 수행해 가는 차례)의 방법으로 삼는 것은 큰 착각이며 육조가 말씀하신 정, 혜의 본 뜻이 아니다.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곧 두 몸이 있으나 두 갈래가 아니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知)體 光是燈之用 卽有二體 無兩般 此定慧 亦復如是-敦 二九五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나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나니,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몸은 본래 같은 하나이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卽不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 亦復如是-大.興.德.宗 二九五(67)
*정, 혜를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저 정, 혜는 적조(寂照 고요함과 비침)를 말함이니, 일체 미망(迷妄)이 없어지면 자연히 진여혜광(眞如慧光)이 드러나 적조가 쌍류(雙流)하여 정혜등지가 되어 제불의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들게 된다. 그러므로 정혜등등(定慧等等 정과 혜가 함께 하고 함께 함)의 구경불지(究竟佛智)가 아니면 정, 혜가 아니요 미망이다.
점문(漸門)에서 '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以定治平亂想]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이것을 '정혜쌍수(定慧雙修 정, 혜를 쌍으로 닦음)'라고 하나, 이는 정혜등지인 육조의 정, 혜는 아니다.
최상승법을 닦으면 경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고 옴도 없나니, 정,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아니하므로 삼세제불이 여기서 삼독(三毒)을 바꾸어 계정혜(戒定慧)로 삼느니라.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 是 定慧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 變三毒爲戒定慧-敦 三一三
*정혜등등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나니, 이는 삼세제불의 자성삼매(自性三昧)이다.
정,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모양이 있느니라.
定慧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敦 二九三(69)
*정혜각별(定慧各別 정과혜가 서로 다툼)하면 법에 두 가지 모양을 둔 것으로서 정혜등등한 육조의 정혜는 아니니, 종문(宗門)에서 금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으로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린다[以定治平亂想]'하고,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정과 혜를 각각 따로 하여 점수(漸修)의 방편으로 삼으니, 이는 실로 육조의 사상을 거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을 버리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언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곧 대혜(大慧)선사가 오매일여에 이르렀으나 원오( 悟)선사는 '언구를 의심치 않음이 큰 병이다[不疑言句是爲大病]'고 꾸짖으므로, 마침내 대혜선사가 대오(大悟 크게 깨침)하여 양기정전(楊岐正傳)을 계승한 것이다.
'오매일여한 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라]'고 한 태고(太古)선사의 유훈(遺訓)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서도 화두를 힘써 참구해야 한다.
만약에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한결같음),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으나 한결같음)도 안 된 미망에서 화두를 버리고 정혜쌍수를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며 불조의 혜명(慧命)을 끊어 버리는 잘못된 법이니, 오직 <단경>을 스승으로 하여 가르침을 바로 계승하는 본분납승(本分衲僧)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육조가 천명한 내외명철의 단경사상이다.
곧 마음을 혜라 하고 곧 부처가 이에 정이니, 정과 혜가 함께 하여 마음 속이 청정하니라. 이 법문을 깨침은 너의 익힌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인(因)은 본래로 남[生]이 없음이라,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가 바르도다.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等 意中 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因本無生 雙修是正-德.宗 三三七(72)
*이는 나중에 추가된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있다. 이 쌍수를 점수문으로 오해하는 바 있으나, 이는 본 송(頌)과 같이 마음속[意中]이 청정하여 정혜등등한 자성무생(自性無生 자성은 남이 없음)에서 하는 말이다. 무생(無生 남이 없음)에서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라 함은 적조쌍류(寂照雙流 고요함과 비침이 쌍으로 흐름)라 함과 같으니, 무생을 깨달아 마음속이 청정하면 자연히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여[照而常寂] 적조쌍류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혜등등이며 등지(等持 함께 지님, 삼매)라고 하는 바, 정 가운데 혜가 있고 혜 가운데 정이 있어서 정, 혜가 쌍등(雙等 쌍으로 함께 함)하므로 쌍수라고도 한다.
6. 무생서방(無生西方)
우매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기에 가서 나려 하고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그 마음 깨끗함을 따라서 불국토도 깨끗하다'하시니라.
迷人 念佛 往生彼 悟者 自淨其心 所以佛言 隨其心淨 則佛土淨-敦.大.德.宗 三二三
마음에 다만 깨끗치 않음[不淨]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마음에 깨끗치 못한 생각이 일어나면 염불을 해도 왕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但無不淨 西方 去此不遠 心起不淨之心 念佛 往生難到-敦 三二四(74)
마음 자리[心地]에 다만 착하지 않음[不善]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만약 착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면 염불하여도 왕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
心地 但無不善 西方 去此不遙 若懷不善之心 念佛 往生難到-大.興.德.宗 三二四(75)
*정토가(淨土家)에서는 대업왕생(大業往生 업을 지닌 채로 극락 세계에 가서 남)을 주장하여 착하지 못한 사람도 미타(彌陀)의 원력으로 극락에 가서 난다고 말하지만, 설혹 가서 난다 하여도 이는 자기의 업력(業力)에 따르는 환주장엄(幻住莊嚴)이요, 모든 부처님의 실지정토(實地淨土)는 아니다.
내외명철하면 서쪽 나라와 다름없나니, 이 법을 닦지 않고 어떻게 서쪽 나라에 이르리오.
內外明徹 不異西方 不作此修 如何到彼-敦.大.興.德.宗 三二五
*내외명철은 묘각정토(妙覺淨土)니, 이것이 육조의 정토이다. 십지(十地)와 등각(等覺)도 내외명철한 제불정토(諸佛淨土)와 법신불(法身佛)인 아미타불은 보지 못한다.
만약 무생인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쪽 나라를 봄이 찰나 사이에 있느니라.
若悟無生頓法 見西方 只在刹那間-敦.大.興.德.宗 二九五(76)
*<단경>의 사상은 철두철미한 자성자오(自性自悟 자기의 성품을 스스로 깨침)에 있으므로, 그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한 생각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곳곳마다 연꽃 피나니, 한 꽃에 한 정토요 한 국토에 한 여래로다[一念心請淨하면處處에蓮花開니一華一淨土요一土一如來라]'고 한 방거사(龐居士)의 송구(頌句)가 단경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설사 대업왕생을 한다 하여도 제불정토와 미타면목(彌陀面目)은 꿈에도 보지 못하나니, 자성자오하여 남이 없음[無生]을 단박에 깨달아(頓證], 참으로 미망으로부터 해탈하여야 한다. 미타(彌陀)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지 못하는 왕생은 꿈 속의 꼭두각시 놀음[夢中幻戱]이니, 선가(禪家)에서 선정겸수(禪淨兼修 선과 정토를 함께 닦음) 운운하는 것은 본분납자(本分衲子)가 아니며 육조의 법손이 될 수 없다.
7. 불오염수(不汚染修)
대사가 말씀하셨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한 물건이라고 말씀드린다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修證]하는가?"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
대사가 말씀하셨다.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不汚染]은 모든 부처님께선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니라."
師曰 什 物 恁 來 曰說似一物 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德.宗 三五 九(78)
*불오염(不汚染)을 육조는 무념이라고 하였으며, 무념은 내외명철인 불지(佛地)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불지무념이 아니면 불오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오염은 제불의 호념하는 바이며, 너도 이러하고 나 또한 이러하도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행을 수행[修行佛行]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수증(修證 닦아 증득함)이란 무슨 말인가?
옛 조사들은 이 불오염의 수증을 점차수증(漸次修證 점차로 닦아 증득함)이 아니요, 불지인 원증(圓證) 후의 원수(圓修)라고 하여, 착의끽반(着衣喫飯 옷 입고 밥 먹음), 소지분향(掃地焚香 땅을 쓸고 향을 사룸) 등을 지칭하는 바, <털끝만큼도 닦고 배우는 마음이 없고, 모양 없는 빛 속에서 항상 자재하다[不起纖毫修學心하고無相光中常自在라]>고 한 것이다.
이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 수증을 점수사상에 배합하여 망상을 닦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이 불오염을 모르는 큰 잘못으로서, 육조의 법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수문에서도 불오염을 주장하기는 하나, 점수문의 돈오는 '육진의 번뇌가 전과 다름 없어서[客塵煩惱 如前無殊]' 무념이 아니므로 생각 생각 오염되어 불오염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념을 돈증(頓證 단박에 깨침)하기 전의 수행은 모두 오염수(汚染修)인 것이다. 비록 망념이 본래 공(空)한 것은 안다 하여도, 망념이 계속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므로 경계를 따라 생각이 일어나[遇境生念] 전전(轉轉)히 오염되기 때문이다.
8. 불보리인(佛菩提因)
만약 수행하여 부처님을 찾는다고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眞]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으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因]이로다.
若欲修行云覓佛 不知何處欲求眞 若能身中 自有眞 有眞 卽是成佛因-敦 三八六
*몸 가운데 진여(眞如)가 있는 줄 알면, 이것이 수도하여 성불할 수 있는 씨앗이 된다는 말이다.
만약 수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할진댄 어느 곳에서 참됨을 찾으려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만약 마음 가운데 스스로 참됨을 보면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로다.
若欲修行覓作佛 不知何處擬求眞 若能心中 自見眞 有眞 卽是成佛因-興.德.宗 三八六(81)
*돈황본에는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이 있다[身中自有眞]'고 되어 있고, 다른 각 본에는 '마음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心中에自見眞]'고 하여 서로 차이가 있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은 몸 속에 진여가 있음이 되고, '마음 가운데에서 스스로 참됨을 본다'함은 진여를 스스로 보는 것인지라 곧 견성이 된다. '몸 가운데 참됨이 있음[身中有眞]'은 성불하는 씨앗[成佛因]이지만, '마음 가운에서 참됨을 봄[心中見眞]'은 견성인 불과(佛果)로서 인지(因地)가 될 수 없으므로 <단경>의 '견성즉불(見性卽佛 견성이 곧 부처)'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물론 다른 본들도 '참됨을 보는 것이 곧 성불하는 씨앗[見眞卽成佛因]'이라고 하지 않고 돈황본처럼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有眞卽成佛因]'이라고 하였으므로 원칙상 모순은 없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에서 참됨을 본다[心中見眞]'고 해 놓고 바로 뒤에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有眞卽是成佛因]'이라고 하였으니, 돈황본이 아닌 다른 본들은 자체의 모순을 면치 못하므로 앞뒤의 글이 맞지 않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니, 만약 몸 가운데서 스스로 보는 걸 찾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는 씨앗이로다.
化身報身及淨身 三身 元本是一身 若向身中 覓自見 卽是成佛菩提因-敦 三八五(83)
*'멱자견(覓自見)'을 '찾아서 스스로 본다'고 하면 이는 견성한다는 말로서 성불하는 씨앗이 아니므로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스스로 보는 걸 찾는다'고 하면 '견성하는 길을 닦는다'는 말이므로 성불하는 씨앗이라 하여도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화신 보신 및 정신이여! 세 몸이 원래 한 몸이라, 만약 자성 가운데로 향하여 능히 스스로 보면 곧 성불하는 깨달음의 씨앗이로다.
法身報身及化身 三身 本來是一身 若向性中 能自見 卽是成佛菩提因-興.德.宗 三八五(84)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함은 견성이 된다. 그런데 견성은 불과(佛果)요 인지(因地)가 아니니 '성품 가운데서 스스로 본다[性中自見]'고 하면서 '성불하는 씨앗[成佛因]'이라 하면, <단경>의 '견성즉불'이라는 원칙에 어긋난다.
본디 각 본에서는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見性 卽名爲佛]'고 하였고, 또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고 하여 '견성즉불'을 더욱 강조하였으니, 이 대원칙(大原則)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뒷사람들이 베껴 쓸 때 잘못하였거나 아니면 일부러 고쳐 바꾼 것일 터이므로,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道元)의 필사본(筆寫本)이라는 대승사본에는 논란이 된 앞의 두 구절이 들어 있는 '자성진불송(自性眞佛頌)'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모름지기 돈황본 및 다른 본에 일관된 근본 사상은 내외명철, 법신불, 묘각견성(妙覺見性), 오인돈수, 자성돈수의 돈법돈교, 불지무념을 전제로 한 무념위종, 식심견성, 오후수행불행(悟後修行佛行) 등이니, 이에 어긋나는 사상은 모두 없애고, 오직 <단경>의 근본으로 돌아와 육조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어야 한다. 특히 각본 가운데서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곧 부처라 한다[識心見性 卽名爲佛]', '만약 자성을 알면 곧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若識自性 卽至佛地]'와 같은 법문은 육조의 가르침을 바로 잇고 드날리는 데 한층 도움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