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이근원통(耳根圓通)의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白道 박만주 2017. 12. 19. 06:58
 

 


  이근원통(耳根圓通)의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들으라〔反聞聞自性〕


최근 염불선(念佛禪)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관련 불서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가운데, 온 -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염불선 수행모임들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일반 재가 불자들은 물론 심지어 선방에서조차 화두 대신 남몰래 염불하는 수좌들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간화선을 참구하다 수행의 성과를 얻지 못한 적지 않은 수행자들이 남방불교 수행법인 위빠사나로 방향을 선회한 지 어언 20여 년. 위빠사나의 세밀한 수행방편에 다소 지친 수행자들이 이제는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염불선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염불의 쉬운 방편과 더불어 '부처의 마음'을 일깨우는 선(禪)의 고준함을 동시에 닦을 수 있는 염불선에서 수행 여정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옛부터 우리나라의 고승들은 원효(元曉) 스님을 필두로 염불을 가장 친숙한 수행법으로 널리 전해왔다. 고려 시대의 나옹(懶翁), 태고(太古) 스님이나 조선 시대의 서산(西山) 대사를 비롯해 근대에는 효봉(曉峰), 청담(靑潭), 동산(東山) 스님과 같은 선사들도 아미타부처님을 염하거나 염불을 권장했다. 선사들이 염불을 권하는 것은 일반적인 서방정토(西方淨土)로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염불과는 달리 자성불, 법신불을 염하는 유심정토(唯心淨土)의 선(禪)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염불선의 형태는 좀더 구체적인 3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 첫째는 염불이 주가 되고 선이 종이 되는 경우이다. 이때는 서방정토로의 왕생이 목표가 된다. 둘째는 선이 주가 되고 염불이 종이 되는 경우이다. 이때는 유심정토 즉, "내 마음속에 정토가 있다"는 관점이다. 셋째는 자력과 타력 수행을 겸수한다는 의미에서 염불과 선을 병행하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염불선의 의미는 주로 둘째, 셋째의 개념에 해당될 것이다.


염불선의 가장 일반적인 예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하는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에서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화두는 현대 중국과 대만의 선종에서 가장 보편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염불과 선의 자연스러운 융합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염불수행이 승속을 막론하고 일반화되어 왔으므로 이 화두는 특히 염불행자가 참선 공부로 바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적당한 화두로 채택되었다. 동시에 이것은 염불수행과 무관하게 하나의 일반적 화두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왜냐하면 염불이라는 것 자체가 깨달음을 향한 내면적 노력이며, 염불하는 자기의 본성을 떠나서는 달리 염불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이 물음은 곧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을 찾는 것이며, 염불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반적으로 화두를 본다는 것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을 보는 것이다. 그 어떤 언구를 어떤 식으로 하든 간에, 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선의 요체는 참구하는 자신의 성품을 '돌이켜 비추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 선종의 조사이자 염불선의 개창자로 알려진 무상 선사의 염불선 수행법을 고찰하는 것은 염불선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무상 선사가 신라 왕자 출신인 점을 감안한다면, 국내에서 불고 있는 염불선 열풍의 근원에 닿아있는 무상 선사의 염불선 수행법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 선사의 염불선은 어떤 것일까? 무상 선사의 염불선으로 알려진 소위 '인성염불(引聲念佛)'에 대한 기록은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짤막하게 나와 있다.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 만 인을 위하여 수계하였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서 설법하며, 먼저 인성염불을 하며 일성(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억(無憶: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 무념(無念: 현재의 시비분별을 떠나라), 막망(莫忘: 미래에 대해 망상하지 말라)하라. 무억은 계(戒)요, 무념은 정(定)이며, 막망은 혜(慧)이니라.' 이러한 삼구는 바로 총지문이다."


인성염불이란 것이 과연 어떤 염불법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는 '일성(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라는 대목이다. 계속해서 염불 소리를 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숨이 다 내뱉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행법은 부처님을 염한다거나, 그 글자가 지니는 뜻에 집중하는 염불이 아니다. 인성염불이 목표로 하는 최종 도달처가 '무억, 무념, 막망'의 무념이라는 점에서 인성염불은 칭명염불(稱名念佛)이나 관념염불(觀念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또는 기타 다

염불의 형태하고는 다른 것이다.


종밀 스님은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 y)』에서 무상 선사의 인성염불을 '남산염불문선종(南山念佛門禪宗)'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내용적으로 염불선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무상 선사의 인성염불을 염불선으로 규정한 이들은 현대 일본의 불교학자들이었다. 세키구치마사히로(關口眞大)는 그의 대표작 『선종사상사』에서 무상의 인성염불을 '염불과 선을 일체로 되게 하는 염불선'이라고 주장했다. 이후로 무상 선사는 선학계에서 염불선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무상의 인성염불은 『능엄경』에서 제시하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인 '이근원통(耳根圓通)' 즉 일명 '관음법문(觀音法門)'의 원리를 따르고 있기에, 염불선이 아니라 '능엄선(楞嚴禪)'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명칭에 따른 차이일 뿐이다.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反聞聞自性〕"는 점에서 오히려 본래 자성을 확인하는 선(禪)의 요소를 더욱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성염불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근원통'의 원리를 파악하려면 일단 『능엄경』을 살펴봐야 한다.


"들음을 돌려 소리에서 해탈한다면 능탈을 무엇이라 이름하리오. 1근(根)이 본원으로 돌아간다면 6근이 해탈을 이루게 된다〔旋聞與聲脫 能脫欲誰名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6근 가운데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근(耳根)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면 나머지 오근도 동시에 개발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육근을 모두 다 닦을 것 없이 이근 하나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 이근원통의 법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성염불은 이근(耳根)을 통한 소리에 대한 집중을 중시하는 수행법이기에 이근원통의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능엄경』의 다음 설명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랴!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 여섯 개의 근도 이와 같아서 원래는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에 의지하여 이것이 나뉘어 여섯 개와 화합하나니 한 곳이 회복함을 이루면 여섯 작용이 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티끌과 때가 생각을 따라 없어져서 원만하게 밝고 청정하고 오묘하게 되리라. 남은 티끌은 아직도 배워야 하지만 밝음이 지극하면 곧 여래이니라."


여기서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는 부분이 이근(耳根)의 원통(圓通)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원통이란 표현은 "편벽되지 않고 두루 통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근을 닦아야만 두루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능엄경』에서 열거하는 25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인 이근원통은 '관음법문'이라고도 한다. 관음(觀音)이라 한 까닭은 관세음보살이 행한 수행법이라는 뜻과 소리를 관한다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에서, 다음에는 '듣는 놈을 되돌리는〔反聞聞性〕' 수행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실제로 선사들 가운데는 이근을 통한 소리를 듣고 곧바로 돈오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백장(百丈) 선사 문하에서 어떤 승려가 종소리를 듣고 깨우쳤는데, 백장 선사는 "뛰어나도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입도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향엄(香嚴) 선사는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에 견성했고, 원오(圓悟) 선사는 닭이 날개 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조선의 서산 대사가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오도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근원통의 마지막 단계는 반문문성(反聞聞性), 즉 듣는 성품 자체를 다시 반문한다는 뜻이다. 이런 깊은 뜻이 무상 선사의 인성염불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된 다음이라야 지극히 요긴함이 된다. 무릇 들음을 버리고 듣는 놈을 돌리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과 보리수와 무설시(無說示)와 중향처(衆香處)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능엄경』


듣는 것, 즉 소리에 대한 집중도 놓아버리고 무설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반문문성'이다. '무설시'란 아무것도 설하는 것이 없는 경지로 무상이 인성염불이 다한 뒤에 제시한 삼구, 즉 무억·무념·막망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반문문성'의 수행법은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화두로 정착되었다. 소위 염불공안법(念佛公案法)이 이것이다. 운서주굉(雲棲株宏)이 『선관책진』에서 주장한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라는 공안은 이근원통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반문문성의 원리를 응용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 또는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를 돌파할 때 소리를 넘어선 무설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것이 무상이 말한 삼구이자 무주가 말한 무념의 세계인 것이다.


결국 무상 선사의 인성염불은 '이근원통'과 '반문문자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염불공안법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염불선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 염불과 선의 조화를 이룬 염불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무상 선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이자 조사(祖師)라 할 것이다.



월간 선문화 2005년 11월호에 기고한 글.



 이근원통의 '반문문자성'  정토불교 교리방  2008/02/1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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