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밖서 부처를 찾지 말라
본심 알면 번뇌망상·생사 없어 해탈
눈(肉眼)으로 보는 것을 시(視)라 한다면 마음(心眼)으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불교는 보는 세계보다는 ‘관(觀)하는’ 세계에 중점을 둔다. 보는 세계는 외부의 세계요, 관하는 세계는 내부, 즉 주관(主觀)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바로 의식중에 있는 세계요, 생각하는 세계다.
혜능스님 사상의 진수(眞髓)가 <육조단경>이라고 한다면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蜜法)’은 그의 심지(心地) 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선지식이여! 마하반야바라밀이 가장 높고 최상이며 으뜸이니 머무름(住)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오는 것도 없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가운데로 좇아 나오셨느니라.” (善知識 摩訶般若波羅蜜 最尊最上最第一 無住無往 亦無來 三世諸佛 皆從中出)
이 마하반야바라밀법은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을 여실히 밝힌 법문이니, 선가(禪家)의 다시 없는 심지(心地) 법문으로써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마음의 지혜를 성취하면 번뇌망상 속에 부처가 있고, 시장 한복판에서 온갖 시비분별을 하더라도 보리반야(菩提般若)가 밝게 빛난다. 만일 마음이 미해 깨치지 못했다면 아무리 깊은 산 조용한 굴 속에 숨는다 해도 번뇌망상이 죽끓듯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 관조(觀照)하면 안팎이 하나로 밝게 드러나서 제 본심을 알게 되고 본심을 알고 보면 번뇌도 망상도 없고 생도 사도 없고 육체도 생각도 없어서 누가 괴로움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다. 이것이 개안(開眼)이고 열반 해탈이며 반야삼매(般若三昧)의 성취이며 무념(無念)이다. 무념법을 깨달아야 부처님의 지위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이어서 혜능스님은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역설한 정토관(淨土觀)의 선정일여(禪定一如)와 재가불교 대중화 운동의 시사적 법문을 하시고 있다. 마음을 닦아 마치면 이곳이 곧 극락이지만 십선(十善)을 행하지 않으면 서방정토에 나고자 해도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다.
본문 내용에서 ‘승속간(僧俗間)에 흔히 아미타불을 칭념하여 서방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는데, 과연 그 곳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스님께서는 이 의심을 풀어주소서’라는 질문이 나온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정리하면, 하근기의 사람에게는 먼 길을 말하고 상근기의 사람에게는 가까운 법을 말하게 되는데, 죽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은 하근기의 사람이 하는 법이고, 상근기의 사람은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음의 부처를 구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상근기는 곧 10악8사(十惡八邪)를 끊고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성품을 보아 성불한다. 그래서 부처님도 “그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이 곧 부처님 국토가 청정해지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마음으로 보고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현상으로 보는 것은 현상계(現象界)에 대한 집착으로 마음이 미혹되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의 입장에서 보면 아미타불이 따로 있을 수 없고 극락세계가 서방에만 별도로 있을 수 없으며, 극락세계 아닌 데가 없고 아미타불 아닌 사람이 없다.
혜능스님은 후학들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자성진불게(自性眞佛偈)를 남겨 스스로 구하도록 가르치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임종게(臨終偈)를 설하시고 단정히 앉아 그날 밤 삼경에 천화(遷化)하셨다. <육조단경>은 이 때의 광경을 “신비로운 향기가 방안에 그윽히 나는 듯하고, 흰 무지개가 땅에 꽂혀 있는 듯 하였으며, 숲의 나무들은 흰색으로 보이는 것 같았고, 날고기는 짐승들도 슬피우는 것 같았다”라고 장식하며 그 막을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