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론 노트] 2. 觀에 대하여
2. 觀에 대하여
止만을 수행하면 無想無念 성사되나
마음이 침몰하여 해이해져 해태하니
적극적 利他行의 온갖선행 잊게되어
대비심 멀어지니 觀을수행 바로잡세
마음을 멈추어서 선정함이 止이지만
제법의 생멸이치 관찰함은 觀이라네
이에는 法相觀및 大悲觀과 더불어서
大願觀 精進觀등 네가지의 觀法있네
有僞法 생멸인연 그이치를 관찰하니 ---------- 무상관(無常觀)
제행은 무상하여 세간의법 변해가고
心行도 찰나찰나 생멸하니 苦痛이며 ---------- 苦觀
우리몸 不淨한것 즐겨할것 없는걸세
과거에 念한법은 그모두가 꿈만같고------------ 無我觀
현재의 모든것은 번개처럼 사라지며
미래의 온갖것은 뜬구름과 같은거니
그모두 허망한것 집착할것 없는걸세
중생은 無常苦에 無我不淨 그것임은----------- 不淨觀
나이제 觀해보니 우리중생 불쌍하오 ----------大悲觀
그들은 무시이래 무명으로 훈습되어
마음이 생멸하여 몸과마음 고통받네
현재도 고통으로 무량핍박 받지만은
미래도 한량없는 모든고통 받을지나
중생은 그걸몰라 고통받아 헤메이니
나이제그들위해구제서원세우겠네
그같이 어리석은 우리중생 불쌍하여-----------大願觀
크나큰 용맹심을 그들위해 일으켜서
그중생 구제코저 큰서원을 세우오니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나이제 온갖분별 벗어나서 차별없이
중생을 구제코저 온갖선행 닦사오니
미래를 다하여서 한량없는 방편으로
그들을 구제하여 열반얻게 하옵소서
나이제 이서원을 여기에서 세웠으니------------精進觀
언제나 어디서나 온갖선행 정진하며
버리지 아니하고 태만없이 수학하여
내힘이 미치는한 모든선행 실행하세
앉아서 전념으로 止수행을 할때외는
언제나 어디서나 觀수행을 실천하여
할일과 안할일을 한결같이 분별하고
그같은 실천수행 끊임없이 닦아가세
3. 止觀俱行
처음엔 止와觀을 따로따로 수행하나
수행을 거듭하여 禪定지혜 성취되면
止觀을 함께닦는 수행방법 들게되니
이두門 서로도와 떨어지지 못한다네
본성은 不生이라 念을함과 그동시에
인연의 선악과보 상실되지 아니함을
止에서 염하면서 觀의입장 살펴보며
逆으로 觀에서도 止의입장 살펴보세
범부의 세간집착 止 으로 치유하며
二乘의 생사겁약 觀으로서 치유하여
대비심 일으키는 이타행을 닦게하고
범부가 닦지않는 선근수행 일으키세
이렇듯 止와觀은 서로도와 이루어져
그둘이 함께하여 떨어지지 못하는 것
만약에 止와觀을 함께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보리의길 들어가지 못한다네
======================================================
이 글의 본문에서도 백련선생님께서 밝히셨다시피,
기신론에서는 관법으로 네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물론, 기신론 본문에는 이 관법의 이름들이 명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후대에 붙였겠지요.)
순서대로,
法相觀및
大悲觀과 더불어서
大願觀
精進觀등
네가지의 觀法있네
그리고 맨처음 법상관의 종류에 네가지가 있는데,
무상관(無常觀)
고관(苦觀)
무아관(無我觀)
부정관(不淨觀)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신론 본문에서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
소승선을 흔히 관법이라고 하지요.
관법을 소승선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대승선에서였을 테구요,
그 내용은 흔히, 아함경이나 4념처경(맞나?)에 있다시피,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범념처의 네가지라고 하구요,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혹은 에비수행으로) 한 것이 5정심관(五停心觀)이라고 한다지요.
책에 보면.
그러니까, 대승 이전에는 참선 보다는 오히려 관법이 있었고,
이것을 비파사나로 했다.
그런데, 대승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선나, 드히야나라는 이름이 더 유행했고,
그것이 선정바라밀이 되었고,
종전의 비파사나를 관법이라고 이름하면서, 소승선이라고 이름받게 되었다고 되겠네요.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비파사나란 것이 6바라밀중에서 반야 보다는 선정 쪽에 가까운 것 아닌가 싶은 거지요.
그러면, 소승 비파사나하고, 대승 선정하고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학자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기본적으로, 대승으로 들어와서 소승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공사상과 보살사항이겠지요.
그 중에서 기존의 관법에 공사상이 더욱 강화되었고, 삼마타 (즉, 삼매, samatha) 개념이 훨씬 더 강화되면서, 비파사나를 오히려 소승적이라고 몰아낸 것 아닌가 싶네요.
소승에서는 선나나 삼마타라는 말이 잘 안나오는데,
대승선에 오면 비파사나라는 용어가 별로 안 쓰이거든요.
(물론, 대승선 외에 최상승선이라는 것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선종에서 자파 우위적으로 만든 말이므로, 그들의 최상승선도 일종의 대승선으로 보면 되겠구요)
그러나, 마명대사는 기존의 공사상들을 정리해서 비파사나라는 항목에 넣으셨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지요.
======================================================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인데, 전에도 말씀드린)
공사상과 반야 간에는 약간 거리가 있고,
(반야바라밀의 핵심은 바로 공사상이지만, 그것과 그것이 완전히 동의어는 아니지요.
아마도 역사적인 어떤 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 같네요. )
그와 비슷하게, 비파사나를 수행하면 반야바라밀에 이른다는 것도, 아니 이것이야말로 제법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명대사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파사나를 따로 설정해서, 지문 관문 이렇게 6문을 설정하지 않고,
제5 지관문으로 하였고, 6바라밀에서는 그대로 지혜바라밀을 놓으셨지요.
========================================================
이것은 사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선종의 기본 교리가 되니까요.
(사실 참선 해서 반야바라밀에 이르지 않고, 비파사나를 해야 반야에 이른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역대조사, 천하 종사들은 다 잘못 공부했다는 뜻이 되쟎아요? 그 말이 맞다면 지금 당장 우리모두 "안암동 로타리"로 가야지요)
6조대사께서는 단경에서,
선정과 반야가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정은 체고 반야는 용에 해당한다고도 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는 절로 드러난다고도 했구요.
여기서 말하는 선정이란, 삼마타로부터 시작해서 삼마제 (혹은 삼마발제), 그리고 선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겠지요. 어디에도 관법이라든지, 비파사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산대사가 비파사나를 통해서 반야바라밀에 이른다고 한다면,
혹은 기신론이 그런 뜻으로 쓰였다면 어느 쪽인가는 틀리는 거지요.
저는 6조대사 쪽이구요,
마명대사도 그런 의미로 쓰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비파사나에는 초기 공사상이 많이 들어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요.
====================================================
저는 뭐 이런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닙니다.
세 분 다 훌륭하신 분들이니까요.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이 다 있는 거니까요.
제 주제에 어딜 감히
그럴 능력도 없구요.
그저, 심심하니까,
괜히 시비를 붙여서
흥미를 좀 유발해 볼까 해서
좀 경망스럽게 떠들어 봤어여. . . . . . . .
이전: [반야심경강의] 1. 공(空)은 근본이다
다음: 대승기신론 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