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생법인(無生法忍) | 大愚선사님 법문
< 질문 > 깨달은 사람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까?
< 답변 >
질문자는 지금 살았소, 죽었소?· · · 끝끝내 이 육신을 '나'로 알고 고이고 섬기고 하고 있으니, '나'와 '내 것'이 혹시 어떻게 될까봐 늘 두렵고 전전긍긍하는 거요.
참성품은 허공 같아서 거기엔 삶도 죽음도 없고,
있음도 없음도 없소. 동정(動靜) 간에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소. 그것이 여러분의 본향(本鄕)이요,
여러분의 본래 몸이고, 그게 법성신(法性身)이오. 온갖 법의 성품이 곧 법성이라, 그것은 무생성 (無生性)이요 허공성이니 온갖 법은 나는 일이 없는 거요.
이 세상 모든 법이 인연 생기(因然生起)라 자체로는 성품이 없어서
미혹한 눈에는 나는 듯 보이지만 본래 나는 법이 없는 거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기 전엔 절대로 공부의 진척이 있을 수 없소.· · · '나'까지 포함한 만법이 무생이오. 그 어느 것도 예외가 없소.· · · 나는 일(生)도 없으니 모습이 없을 것이요, 모습이 없으니 성품도 없고, 작용 또한 없소.
결국 이름이 있고 뜻이 있는 물리적 정신적 모든 형상은 꿈같고 환 같아서 실다운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요. 그럼 지금 면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그게 뭔가?· · · 미혹한 중생이 자기 업대로 지은 업의 그림자요.· · ·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꿈속에선 온갖 일들이 실제처럼 보이듯이, 그렇게 요술처럼 지어내는 거요. 그게 영각성(靈覺性)이오. 그 신령한 성품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능히 모든 것을 지어내는 거요. 마치 음성에 의해 메아리가 나듯이,
그렇게 참 성품이 여러분의 생각 생각에 따라 그저 응현할 뿐인 거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 바보 같은 생각으로 그냥 응해줄 뿐 범부가 범부 탈을 벗지 못하는 것은 「만법이 성품 없음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법은 연생(緣生)이요, 연생이기 때문에<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는 말은 모든 것을 실유(實有)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범부의 전도악업(顚倒惡業)을 해소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문(要門)입니다.
중략(中略) 하고, ···
「이 법이 본래 생멸법(生滅法)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방 「모든 법은 나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다」고 알아버리지요.
그렇지만 이 말의 참 뜻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은 생멸법을 여의지 않는다」
즉, 나는 게 그대로 나지 않는 것이요, 나지 않는 게 그대로 나는 것임을 밝히려는 것인데, 만약 여기서 <난다>와 <나지 않는다>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결정해(決定解)를 지으면 이는 원돈법(圓頓法)을 해치는 것이므로, 결국 불법을 비방함에 해당하는 겁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건만, 다만 간택(揀擇)함을 꺼릴 뿐이노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이 말을 듣고 「그래! 이제부턴 결코 간택하지 말아야지」 한다면, 이는 <간택함>과 <간택하지 않음>의 두 갈래 가운데서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간택한 것이니, 결코 선현의 뜻을 잘 이해했다고 할 순 없지 않겠어요?
그러기에 고인이 말하기를, 「앎이 있으면 범부요, 앎이 없으면 목석이리니, 끝내 <알되 앎이 없음>이 <참 앎>이니라」고 한 것이니, 따라서 원기인(圓機人)은 다만 생각에 즉하여 생각이 없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게 꼭 원인이 있어야만 납니다.
그렇다면 원인도 역시 그 스스로는 성립될 수 없지 않겠어요?
스스로도 성립될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낼 수 있겠어요?
따라서 인(因)도 과(果)도 다 비어서, 이 세상엔 도무지 나는 일이란 없는 게 진실입니다. 이것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말하는 근거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희한한 지견을 얻었다 하더라도
끝내 이 무생지리(無生之理)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며, 이에 이르러, 모든 지혜(知慧)가 다해서, 더는 헤아리고 따지고 천착(穿鑿)하는 등의 지각활동(知覺活動)이 다해서, 더는 의식(意識)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각자에서 본래 구족히 갖춰져 있는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소식인 겁니다.
결국 의식이 움직여서 허망하게 생겨나는 온갖 지견(知見)은,
이것이 인간을 무명의 수렁에 빠뜨린 원흉이니, 「아무리 훌륭한 지견도 없는 것만 못하다」는 선현들의 경책(警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불법'의 요체(要諦)를 알고 싶거든 우선 <만법의 남이 없는 도리>(無生之理)를 철저히 밝혀야 합니다.
1) 이 세상 모든 법은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법은 없습니다.
2) 그런데 인연에 의지하여 나는 법은 <자체의 성품>(自體性)이 없는 게 분명 하거든요.
왜냐하면 만약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인연에 기댈 게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예컨대, 그림자는 물체의 의지해서만 나고, 메아리는 음성에 의지해서만 나기 때문에 자체의 성품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은, <그런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3)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법은,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막론하고, 모두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나>라고 할만한 나가 있다고 집착하는 생각, <남>이라고 할만한 남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라고 할만한 중생이 있다는 생각, 일정공간을 차지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자는 보살이 아니니라」고 했던 겁니다.
결국 불법(佛法) 곧, 진리(眞理)는 본래 생멸법(生滅法)이 아닌데,
미혹한 범부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알지 못해서, 면전(面前)에서 헛되이 생멸상(生滅相)을 봄으로써 유·무(有無) 생·사(生死)가 엇바뀌는 세상사(世上事)가 마치 실제인 양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이르기를,「사람이 태어남이란, 마치 돌계집이 아기를 뱀과 같고, 죽음이란, 마치 허공 꽃이 모습을 감춤과 같다」고 한 것이니, 모름지기 헷갈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짓는 자>가 없으며,
따라서 <짓는 바>도 없다는 게 무생법인(無生法忍)의 골자입니다.
마치 저 바다가 종일 물결치지만 그것이 오직 바람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물결이 스스로 물결치는 게 아니듯이 말이에요.
따라서 24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종일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 그것이 바로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기 때문에 <함이 없다>(無爲)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므로 이 세상사는 지금처럼 치성하게 생멸 변화를 거듭하는 이대로가 무위(無爲)인 것이며, 따라서 <참되고 여여하다>(眞如)는 말과 <함이 없다>(無爲)는 말은
같은 의미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함이 있음>(有爲)이 그대로 <함이 없음>(無爲)인 것이요,
참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무위라고 말하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은 말하기를, 「생사(生死)가 그대로 열반(涅槃)이라」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 같은 뜻으로, <있되 있음이 아니고, 없되 없음이 아닌 도리>가 바로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있게 된 근거인 겁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면서, 일방적으로 <있음>을 말하고 <없음>을 말하는 것은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니. 세간의 이분법적 사고로 진리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산하대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망상으로 생겼느니라.」(從妄想有)
그랬더니 제자가 하는 말이 ··· 「제가 지금 한 생각으로 좋은 금을 한 덩어리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스승이 어이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는 거예요.
이 세상은 진실로 생멸 변천이 없는데, ― <모랫벌 법문>을 잘 생각해 보세요.
인연 따라 숱한 형상들이 생겼다 허물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모두가 모랫벌의 모래일 뿐이지, 하나도 새로 생겼거나 사라졌거나 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
사람들이 허망하게 관견(管見) 하기 때문에. 즉 모랫벌 전체를 놓쳐버리고 국소적(局所的)인 관찰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마치 목전에서 뭔가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유의 근본은 항상 여여(如如)해서 생멸 변천이 없는데,
사람들의 안목이 <드러난 형상>에만 현혹되어서,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 끊임없이 온갖 사물이 생멸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운용되는 양태>는
― 나(生)되 남이 아니고, 멸(滅)하되 멸함이 아니며, 있되 있음이 아니고, 없되 없음이 아닌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게 된 근거인 겁니다.
그런데 범부들의 사고가 철저히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길들여져 버렸기 때문에, 「있다」고 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만 알아서 그 소견이 치우치게 한 쪽에 달라붙기 때문에
성인들이 한결같이 경책하기를, 「마땅히 그 무엇에도 머무는 일이 없이 그 마음을 쓸지니라」 했던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 <있다>만 보내는 게 아니라 <없다> 까지 마저 보냄으로써, 그 마음으로 하여금 일체 만유가 분화(分化) 되기 이전의 영성(靈性)을 회복하여 이를 등지지 않고 마음을 쓰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치로만 이해해선, 그저 하나의 현묘(玄妙)한 지견이 생길 뿐이요, 전혀 안목(眼目)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공(空)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말이 있게 되는 겁니다.
공을 어떻게 사유합니까?
이 세상 모든 법이 비록 겉으로 보기엔
<생겨나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生住異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는 일이 없다는 게 무생법인의 뜻입니다.
즉 지금의 이 세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아무 일도 없는데, 범부들이 실상에 미혹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아우성인 겁니다.
이 이치를 깊이 깨달아 사무치면, 이 몸도 마음도 이 세상도 몽땅 다 없으며, 따라서 그 밖의 모든 것,
― 어리석음도 지혜로움도, 의증(疑症)도 명료(明了)함도, 깨달음도 미혹함도, 부처도 중생도, 생사(生死)도 열반(涅槃)도, 실제(實際)도 진리도, ―
다 성인들이 무명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방편의 시설(施設)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니, 다시는 일체의 언어에 떨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본래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즐겁다>고 해서 즐겁고, <괴롭다>고 해서 괴로운 거예요.
모두가 제가 지어서 제가 받는 건데,
사람들의 마음이 현전상(現前相)에 헷갈려서 ― 꿈속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제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게 꿈이 아닙니까? ― 제 마음이 지어서 나툰 바 <업의 그림자>(業影)를 저 바깥에 있는 객관경계(客觀境界)로 오인하고 이를 좇는 바람에 윤회(輪廻)하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모름지기 진실에 상응(相應)하기를 바라거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철저히 체달 하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생(生)과 멸(滅), <있음>(有)과 <없음>(無)을 가지런히 평정(平定)하여, 그 마음이 천지간을 종횡(縱橫) 함에 길림이 없게 하세요.
본래 마음 밖에는 이 마음의 흐름을 방해할만한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 이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생각이 없음을 알아서,
모름지기 일어나는 생각을 좇거나, 그 생각 속에 뛰어들어서 한 바탕 난리를 피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고 한 고인의 말씀을 잊지 말도록 하세요.
경에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이미 여읜 것이요,
별달리 방편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꿈이니, 허깨비(幻)니 하는 말은, 곧 「그런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남(生)이 없는 도리>를 깨치면 너무도 당연한 말일 텐데,
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사람들은 너무 어렵고 심오(深奧)한 것으로 여겨서 숫제 알아내려고 하는 마음도 내지 않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여름철에 꼬마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광경을 연상해 보세요. 길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모래성도 만들면서 말이에요,
이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길이나 '터널'이나 모래성 등이 새로 생겨났다고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면 이것들이 그저 본래부터의 모래 벌의 모래일 뿐이요,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만 사람들의 인식작용이 국소적(局所的)인 관찰만을 하도록 틀 지워져 있기 때문에 늘 모래 벌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 말이 갖는 함의(含意)는 대단히 크고도 중요합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天動說)을 치워 버리고 지동설(地動說)을 내놓았을 때, 당시의 사람들이 겪은 당혹스러움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 지금 여러분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면서 전개되고 있는 이 세상사가 실제론 티끌만큼도 생멸(生滅) 하거나 가고 오고 하는 일이 없다면, ― 그 말이 그리 쉽게 믿어지겠어요? 지구인들이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믿게 되는데는 4, 500 년이 결렸지만, 이 <남(生)이 없는 도리>는 2500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믿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와 같은 안목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요, 한 인간이 난생 처음으로 진실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며,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 깨달은 사람(覺者)이라고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더는 지체하지 말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도리만 깨닫고 나면 그 밖의 일체의 논의(論議)는 저절로 쉬어질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남아 있어서 의증(疑症)을 일으키겠어요?
참된 출가(出家)는 이 몸과 마음으로 어떤 공덕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실된 바탕>은 항상 여여해서 변동이 없는데,
다만 마음이 경계에 헷갈려서 생멸(生滅)을 보기 때문에 마치 이 세상이 시끄럽게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있음>과 <없음>,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 등의
차별된 모습이 다 빈 말만 있을 뿐이요, 실제는 아무 일도 없는 적멸한 모습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겁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있음>과 <공덕이 없음>이 전혀 제 마음에 달려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이 이르기를,
「모든 공덕의 있고 없음이 전혀 그대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렸거늘, 그대는 어째서 그다지도 걱정이 많으냐?」고 했던 겁니다.
스스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말하면서도
지금에 내가 겪는 모든 체험은 낱낱이 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마땅한 것은 집착하고 마땅찮은 것은 털어 버리려고 하니, 무생(無生)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겠어요?
사족(蛇足)을 달자면, ···
아프기는 아픈데, 거기 <아픈 자>도 <아픔>도 없는 게 진실입니다.
모름지기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법은 자체로 성품이 없어서,
겉보기엔 생기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생기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칠 일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 모든 경계가 성품이 없어서, 안팎이 가지런히 밝고 맑아서 늘 아무 일이 없음을 보면, 그것이 바로 여여한 참 부처가 출흥하는 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학인이 진정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우선 유생(有生) 무생(無生)을 다 보지 않아서,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 등의 일체의 논의가 당장에 쉬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처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종일 말하면서도 바로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남이 없는 도리>인 겁니다.
무생법인을 얻은 지위를 부동지(不動地)라 하는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움직임이 그대로 고요함이어서, 동·정(動靜)이 둘이 아닌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부터 그런 경지가 새롭게 열린 것이 아니라,
본래 무시 이래로 <법이 본래 그러했던 거예요>.
즉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닌, 어느 쪽으로도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가
― 물론 이렇게 말해도 벌써 '진실'과는 어긋나는 것이긴 하지만 ―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인 것이며, 모든 성인이 궁극적으로 학인을 인도하고자 하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인 겁니다.
따라서 어떻게 말해도, 어떻게 알아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진실 자체는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이 방편의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남이 없는 방편의 말씀>을 좇으면서, 그 가운데서 묘한 지견을 얻는 것으로써 수행을 삼으니,
이야말로 원숭이가 물 속의 달을 건지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무슨 공덕이 있겠어요?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겁니다, 이 세상이 온통 당신의 마음일 뿐이니, 따라서 보는 바가 있고, 아는 바가 있다면 그야말로 마음 밖에서 법을 보는 짓이니, 이 사람은 '제 마음'도 모르거늘 어찌 부처를 이룰 수 있겠어요?
한 생각 일어나는 때가 바로 부처가 출흥하시는 때임을 알아서,
그 청정한 마음을 함부로 어둡히지 말아야 합니다.
<'있음'(有)을 여읜 '없음'(無)을 닦는 것>은 '없음'을 잘 닦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성품이 없고'(無性) '모습이 없고'(無相) '작용이 없다'(無作)는 등의 말을 들었을 때, '있음'만 보내는 게 아니고 '없음' 까지 마저 보내서, 끝내 '있음과 없음'의 양변(兩邊)에 다 머물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조금은 법집(法執)에서 놓여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일러서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이라 하는데,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있음'이 아니면 '없음'일 테니, 따라서 '유무의 양변'을 벗어난 사람은 이제 더는 이른 바 질애(質碍)의 핍박을 받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 결코 생멸법(生滅法)을 여의고 성립되는 게 아님을 분명히 깨달으면 지금 현재 면전에서 전개되는 온갖 현상에 대하여 이렇궁 저렇궁 쓸데없는 의논(戱論)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일승종의 문을 닫는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텅 트인 순일(純一)한 허공 가운데 함부로 획(劃)을 긋지 않아야 합니다.
안으로는 일어나는 마음이 없고, 저 바깥의 온갖 존재는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간에 모두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 살펴야 합니다.
결국 <나> 까지를 포함한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적멸하고 청정한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의 망령된 업의 그림자로 나타나는 면전의 법을 실체인 줄 오인해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까닭 없이 고통을 받을 뿐입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요.
그러므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장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서
만법이 남(生)이 없고, 성품도 없어서, 티끌만한 한 법도 간섭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렇게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가 그대로 고요해서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범부의 업장이에요.
그러기에 고인들은 이르기를, 「이 번뇌가 그대로 '보리'이니,
결코 조작하고 대처하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했던 거예요.
사람들이 한 생각 일어날 때,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일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한 생각이 일어나기 무섭게 그 '생각' 속으로 뛰어들어서 한 바탕 법석을 떠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여러 성인들은 한결같이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속히 바른 안목을 얻어서, '생각이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들기를 권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온갖 일이 닥치거든
결코 상관하지 말고, 돌보지도 말며, 그저 문득 무심에 들면 일어났던 생각은 스스로 엷어 지면서 마침내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주의 깊고 인내심을 요하는 수행이므로,
결코 비판하거나 합리와 하거나 취사선택하는 일이 없이, 싸우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그냥 고요히 비추도록 해 보세요.
그리하여 그 <고요한 비춤의 힘>(寂照之力)이 마음에 깃들기 시작하면 당신의 공부는 나날이 늘어날 것입니다.
더욱 정진하세요.
불법에 인연이 있는 사람 치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겠지요?
그런데 실로 묘하게도, 이 말의 '참 뜻'을 깊이 참구(參究)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만법이 나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또 참으로 이치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
모름지기 이 말의 뜻을 깊이 깨달아 살펴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학인들이 필히 넘어야 할 준령(峻嶺)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남이 없는 도리'를 들으면 <남이 없음>(無生)만을 취하고, 이 '남이 없는 도리'가 바로 <남이 있음>(有生)을 여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까맣게 생각이 미치지 못하거든요.
아마도 중학교에 다닐 때, 질량불변의 법칙(質量不變法則)을 배운 기억이 날거예요.
이 '질량불변의 법칙'의 참 뜻은,
화학반응의 앞뒤를 통해서 분명히 그 외양(外樣)에 변화가 있었는데, 그런데 그 질량을 달아보면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서 「 ··· 변하기는 변했는데,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도 마찬가지예요.
즉 「··· 나기는 났는데, 실상은 전혀 난 것이 없다」는 게 그 참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이 있다'고 들으면 <남이 있음>으로만 알고,
'남이 없다'고 들으면 <남이 없음>으로만 알아들으니, 이것이 바로 무명 중생의 가장 고질적인 병통입니다.
― 각설하고,
지금 이렇게 치성하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철저히 깨달아 살펴야 합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들이 오늘도 자신의 시끄러운 마음을 찍어눌러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 허구한 날 우뚝우뚝 주리틀고 앉아서는
<어리석은 선>(癡禪)을 닦는 것으로써 불법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인(達人)은 생각에 즉해서 생각이 없고,
말에 즉해서 말이 없으며, 함(爲)에 즉해서 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함부로 견문풍(見聞風)에 나부끼면서 헛되이 조작(造作)과 대처(對處)를 일삼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본래 몸은, 즉 법신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다만 이 육체의 인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있게 되고, 온갖 병고와 빈궁, 그리고 기갈한서(飢渴寒暑)와 생로병사가 마치 실제인 양 현전(現前)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밥'이 있고 '반찬'이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있어서, 이와 같은 인연들이 알맞게 어울려서 이루어지는 게 바로
'목숨'이요, '삶'이 아니겠어요?
어떻습니까? 그와 같은 인연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당신의 생명력은 혼자서 존립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고유의 목숨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생명 뿐 아니라, 분명히 인연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성립할 수 있는 법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살고 있는 겁니까? '밥'이 사나요, '물'이 사나요, '공기'가 사나요? 비록 육두문자 같지만, 이렇게 조금만 찬찬히 깨달아 살펴보기만 해도 우리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 선문(禪門)의 말을 빌리자면 ―
사람의 태어남이란 마치 돌계집이 아기를 뱀과 같고,
사람의 죽음이란 마치 허공꽃이 모습을 감춤과 같다고 했으니, ― 이 말의 참 뜻을 깊이 되새겨 봄으로써 이른바 생로병사라는 것이 얼마나 꼭두각시놀음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사무칠 일입니다.
모름지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철저히 깨달음으로써 전혀 조작을 빌릴 것 없이, 지금 이대로의 '생사법'이 곧 그대로 '열반'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부처와 조사는 다만 '제 마음'을 깨쳐서 '일'을 마친 사람일뿐입니다.
이 '마음'이 인연을 따르면서 한 생각 내면 온갖 법이 따라서 나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거예요.
즉 지금처럼 그렇게 한 생각을 문득 내면,
― '대자유인의 삶'이니, '여여한 삶'이니 하는 생각들이 불현듯 일어나서 ― 마음이 까닭 없이 헐떡이면서 번뇌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것이 괴로운 '번뇌'건, 기뻐해야 할 '보리'건, 그 모두가 오직 '참 마음' 위에 나타난 허망한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몰록 할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는, 다시 그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성품'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은 생겼다고 할 수 있겠죠.
모름지기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든 것이,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오직 '참 마음'에 비친 허망한 그림자임을 알아서 더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는 '한 마음'>은 공부하는 사람에 의하여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서 늘 환히 눈앞에서 밝게 빛을 놓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항상 그 위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를 오인해서, 저 바깥에 있는 경계인 줄로 잘못 알고 집착을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항상 눈앞에서 환히 빛난다고는 해도 결코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무시 이래로 밖을 향해 내닫기만 하는 그 마음이 사실은 본래 나는 일이 없어서, 억지로 찍어누를 것도 없고, 좇아가면서 집착할 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사무치면, 분별망상은 저절로 점점 엷어지면서 마침내 때가 되면 본래 <청정한 자성불>(淸淨自性佛)이 저절로 우뚝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현정선원 / 大愚禪師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