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장 無德之人, 不依佛戒, 不護三業. 放逸懈怠. 輕慢他人, 較量是非, 而爲根本.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삼업도 지키지 아니하여서, 방일하고 게으르며 남을 업신여기고 시비분별하는 것을 일삼느니라.
한번 마음의 계를 깨뜨리게 되면 백 가지 허물이 함께 일어나느니라. 평하여 이르되, “이런 마구니 무리들이 말법에 불같이 일어나 정법을 어지럽히나니, 학자는 잘 알아 두어야 하느니라.”
강설 서산 스님 어록에 실린 게송이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길 벌판 가운데 지날 적에는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어지럽게 발 떼어 가지 말지니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오늘 나의 행적이 남아 있어서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뒷사람의 표준이 될 것이기에. 참고로 이 게송의 지은이를 혹간 김구(金九) 선생이라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삼업(三業) 사람의 행동양식을 크게 신구의(身口意)로 나눠서 설명한다. 구체적인 덕목으로 입으로는 어떤 말을 하고, 몸으로는 어떤 행동을 하고, 마음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성인들의 가르침의 공통점은 이렇게 ‘신구의’의 조목별로 나눠보면 특히 입으로 말하는 구업(口業)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좋은 일에도 입이고 나쁜 일에도 입이다. 좋은 말 한마디는 삼동의 추위를 녹이고, 거친 말 한마디는 오뉴월에 추위를 타게 한다는 속담 그대로이다. 업(業, kamma)은 빠리어로 깜마이고 범어는 까르마이다. 한번 업을 지으면 관성의 법칙과 같은 추진력으로 다음 행위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늘 경계하라는 뜻이다. ‘착하게 살고 악하게 살지 말라’는 가르침은 천수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십선행(十善行)이 있다.
말법(末法) 부처님의 교법이 세상에 전해지는 과정을 정법(正法), 상법(象法), 말법(末法) 등 셋으로 나눈다. 문헌에 따르면, 말법이라는 말을 처음 쓴 스님은 중국 북제(北齊) 때에 살았던 혜사(慧思) 스님이며, 혜사 스님의 서원문(誓願文)에 나타나 있다. 현장(玄乍) 삼장 법사의 제자 자은 규기(慈恩 窺基) 스님이 지은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에서는 교(敎, 敎法) 행(行, 修行) 증(證, 證得)으로 나눠서 설명한다.
처음 오백 년 동안은 정법(正法) 시대이다. 교법이 온전하다. 수행하는 사람도 많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많다. 다음 천 년 동안은 상법(像法) 시대이다. 정법과 비슷한 시기라는 뜻에서 본뜰 상(像)자를 쓴다. 교법이 있고 수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 다음 만 년은 말법 시대이다.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이 남아 있는 시기이다. 수행하는 사람과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인도를 표준한 말로, 인도의 불교사가 과연 그대로이다. 중국, 한국, 일본 불교사에서 많은 도인(道人)이 나온 시기는 정법 시대를 훨씬 지난 상법, 말법 시대라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자경문에서는 부처님의 계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정법 시대에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처님 재세시에 살아도 정법 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40장
若不持戒, 尙不得疥癩野干之身, 況淸淨菩提果, 可冀乎. 만약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청정한 보리과를 어찌 바라랴.
계를 중하게 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이 한다면 부처님이 항상 곁에 계시리니, 모름지기 들판의 풀에 매여 그대로 누워있던 비구의 일화와 거위가 구슬을 삼킨 것을 보고도 모른다고 말하여 고통을 받은 비구의 일화를 본보기로 삼을 지니라.
강설
이계위사(以戒爲師), 계로써 스승을 삼는다는 가르침이 있다. 어리석은 초심자가 대자유인의 경지를 말하여 계를 소홀히 여기는 무리를 따르는 풍토에서는 다른 가르침보다 크다.
비루먹은 병 개라(疥癩). 개나 말, 여우의 털이 빠지는 피부병이다.
야간(野干) 여우, 이리와 비슷한 짐승이다. 빛은 청황색이고 떼를 지어 다니며 밤에 우는 소리가 이리와 같다. 초계(草繫) 비구 일화 율장에는 옛날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 실려 있다. 마음이 청정한 한 비구가 들판을 가다가 모진 도둑을 만났을 때였다. 도둑은 비구의 옷을 빼앗고 알몸뚱이 팔다리를 풀로 묶어두고 떠나버렸다. 비구는 그대로 계속 누워있었다. 왜냐하면 생명 있는 풀이 끊어질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날씨가 무덥고 게다가 배가 무척 고팠으나 비구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때마침 사냥을 나왔던 임금이 비구를 풀어주고 그 까닭을 물었을 때였다. 비구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생명 있는 풀이 다치기 때문이지요.” 임금님은 청정한 비구의 말에 감동하여 불교에 귀의(歸依)하였다는 고사이다.
아주(鵝珠) 비구 일화 속내가 깊은 한 비구의 이야기이다. 보석을 갈아 세공하는 보석상 집에 가서 탁발을 할 때였다. 그때 주인은 작업실에서 임금의 부탁을 받고 홍보석을 갈고 있었다. 주인이 일이 있어 잠시 안으로 들어간 사이였다. 거위 한 마리가 돌아다니다가 그만 보석을 삼켜버렸다. 뒤늦게 주인이 나타나서 보석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비구에게 물었다. “여기 보석이 어디 갔소?” 비구가 본 대로 말한다면 거위는 당장에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였다.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성미가 급한 주인은 비구를 묶어 놓고 막대기질을 하였다. 비구의 몸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때였다. 거위가 가까이 다가가서 비구가 흘린 피를 먹고 있었다. 주인은 홧김에 다시 거위를 발로 차서 내동댕이쳤다. 거위는 방구석에 박혀 그대로 죽었다. 그제야 비구는 거위가 죽은 것을 보고 사실대로 입을 열었다. “보석은 저 거위가 삼켰어요.” 주인은 곧 거위 배를 칼로 갈랐다. 과연 거위 배에서 보석이 나왔다. 주인은 비구에게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고사이다.
제41장
欲脫生死, 先斷貪欲, 及諸愛渴. 생사 해탈을 하려면 먼저 욕심과 모든 갈애, 연심을 끊어야 하느니라.
애욕은 윤회의 근본이고, 욕망은 몸을 받는 인연이니라. 부처님이 이르셨느니라. “음욕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번뇌 티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느니라.” “한번 얽힌 은혜와 애정은 사람을 끌어 죄의 문으로 집어넣느니라.” 갈애(渴愛)란 애정이 지나쳐서 목이 바짝바짝 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니라.
강설
인간적인 사랑과 청정한 수도는 양립하지 못하는가. 독신 수도자가 가장 이상적인가. 부처님 가르침에, 여자의 사랑이 지금의 두 배가 된다면 아무도 수도할 생각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성의 사랑은 이렇게 수도에 제일 큰 마군(魔軍)이 되기 때문이다.
업력 수생(業力受生) 영가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이다. 업(業)의 힘이 정신을 흐리게 하여 음심(淫心)을 일으킨다. 이때 부모 될 상대 이성(異性)을 사모하며 가까이 다가가 입태(入胎)한다. 이와 같이 입태의 직접 동기는 음욕에서 생긴다고 한다.
| 2007년 02월 통권 388호 | 지묵 스님/칠보산 아란야선원장(http://cafe.s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