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완릉록(宛陵錄)
1. 도는 마음 깨치는 데 있다
배상공이 황벽스님께 여쭈었다. "산중(山中)의 사오백명 대중 가운데서 몇 명이나 스님의 법을 얻었습니까?"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을 얻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언설이란 다만 어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니라."
裵相公 問師曰 山中四五百人 幾人 得和尙法 師云 得者 莫測其數 何故 道在心悟 豈在言說 言說 祇是化童蒙耳
2. 자기의 마음을 알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요 무심(無心)이 도이니라. 다만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움직인다든지, 혹은 있고[有], 길고 짧음, 너와 나, 나아가 주체니 객체니 하는 마음이 없기만 하면, 마음이 본래로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를 따로 구하려 하지 말 것이니,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라. 설사 오랜 세월 동안 6도[六度] 만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경(究竟)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덧없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였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나[我]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남[人]도 없어서 본래 그대로 부처이니라."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無心是道 但無生心動念 有無長短 彼我能所等心 心本是佛 佛本是心 心如虛空 所以云 佛眞法身 猶若虛空 不用別求 有求皆苦 設使恒沙劫 行六度萬行 得佛菩提 亦非究竟 何以故 爲屬因緣造作故 因緣 若盡 還歸無常 所以 云 報化 非眞佛 亦非說法者 但識自心 無我無人 本來是佛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법에는 범, 성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견해도 내지를 말라. 또한 법은 본래 없지 않으나, 있다는 견해도 내지 말라. 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견해로서, 마치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같고, 사량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중생이니라'고 하였다. 조사문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問 聖人無心 卽是佛 凡夫無心 莫沈空寂否 師云 法無凡聖 亦無沈寂 法本不有 莫作無見 法本不無 莫作有見 有之與無 盡是情見 猶如幻 所以云 <見聞 如幻 知覺 乃衆生> 祖宗門中 祇論息機忘見 所以 忘機則佛道降 分別則魔軍熾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6도만행이란 그저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쪽의 일 일뿐이다. 설사 보리, 진여와 실제의 해탈법신과 나아가 10지 4과 등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교화 제도하는 방편의 문일 뿐이어서,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교화 제도하는 모든 방편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또한 일불승(一佛乘)만을 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시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다시 다른 승(乘)이 없나니,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곁가지와 잎은 없고 오로지 모두 잘 익은 열매들뿐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은 쉽게 믿기가 어렵다.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양(梁), 위(魏) 두 나라에 머물렀는데, 오직 혜가(慧可 : 487-593)스님 한 분만이 자기의 마음을 가만히 믿고 말 끝에 문득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도라고 하느니라. 큰 도는 본래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하나의 참 성품으로 같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마음과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이 곧 마음이니라. 마음이 성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조사(祖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 있도다'고 하였다."
問 心旣本來是佛 還修六度萬行否 師云 悟在於心 非關六度萬行 六度萬行 盡是化門接物度生邊事 設使菩提眞如 實際解脫法身 直至十地四果聖位 盡是度門 非關佛心 心卽是佛 所以 一切諸度門中 佛心 第一 但無生死煩惱等心 卽不用菩提等法 所以道 佛說一切法 度我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從佛至祖 不論別事 唯論一心 亦云一乘 所以 十方諦求 更無餘乘 此衆 無枝葉 唯有諸貞實 所以 此意難信 達磨來此土 至梁魏二國 祇有可大師一人 密信自心 言下 便會卽心是佛 身心俱無 是名大道 大道 本來平等 所以 深信含生 同一眞性 心性不異 卽性 卽心 心不異性 名之爲祖 所以云 認得心性時 可說不思議
5. 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 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부처의 견해를 내는 순간 바로 부처에 끄달리고, 중생의 견해를 내는 순간 중생에 끄달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견해를 내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견해를 내는 등이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으며, 큼도 없고 작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인위적 작위도 없다. 이와 같은 한 마음 가운데서 바야흐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을 남겨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의 범, 성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나는도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기 때문에 법 또한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하염 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이 없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하며, 천만 가지 중생들도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너의 견해가 같질 않으므로 차별이 있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모든 하늘사람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정각이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일 뿐, 실로 다른 모양이 없으며, 또한 광채가 빼어날 것도 없고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양이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모양이 없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2상은 모양에 속한 것이니,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라고 한 것이요, 80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 '만약 겉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 佛度衆生否 師云 實無衆生如來度者 我尙不可得 非我 何可得 佛與衆生 皆不可得 云 現有三十二相及度衆生 何得言無 師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佛與衆生 盡是汝作妄見 只爲不識本心 作見解 作佛見 便被佛障 作衆生見 被衆生障 作凡作聖 作淨作穢等見 盡成其障 障汝心故 摠成輪轉 猶如 放一捉一 無有歇期 一等是學 直須無學 無凡無聖 無淨無垢 無大無小 無漏無爲 如是一心中 方便勤莊嚴 聽汝學得三乘十二分敎 一切見解 摠須捨却 所以 除去所有 唯置一牀 寢疾而臥 祇是不起諸見 無一法可得 不被法障 透脫三界凡聖境域 始得名爲出世佛 所以云 <稽首如空無所依 出過外道> 心旣不異 法亦不異 心旣無爲 法亦無爲 萬法 盡由心變 所以 我心空故 諸法空 千品萬類 悉皆同 盡十方空界 同一心體 心本不異 法亦不異 祇爲汝見解不同 所以差別 譬如諸天 共寶器食 隨其福德 飯色 有異 十方諸佛 實無少法可得 名爲阿뇩菩提 祇是一心 實無異相 亦無光彩 亦無勝負 無勝故 無佛相 無負故 無衆生相 云 心旣無相 豈得全無三十二相八十種好 化度衆生耶 師云 三十二相 屬相 凡所有相 皆是虛妄 八十種好 屬色 若以色見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
6. 한 마음의 법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성품 자체는 같고 다름이 없으나 만약 3승의 가르침에 의거해 말한다면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승의 인과가 있어서 같고 다름이 있느니라.
그러나 만약 불승(佛乘)과 조사가 서로 전한 것에 의거해 보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마음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이 일승(一乘)의 도 뿐이요, 2승도 없고 3승도 없느니라. 그러나 부처님의 방편설만은 제외하노라'고 하셨다.
問 佛性與衆生性 爲同 爲別 師云 性無同異 若約三乘敎 卽說有佛性有衆生性 遂有三乘因果 卽有同異 若約佛乘及祖師相傳 卽不說如是事 唯指一心 非同非異 非因非果 所以云 <唯此一乘道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까?" "실로 볼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邊身]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뚜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뚜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 三 ]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問 無邊身菩薩 爲什 不見如來頂相 師云 實無可見 何以故 無邊身菩薩 便是如來 不應更見 祇敎 不作佛見 不落佛邊 不作衆生見 不落衆生邊 不作有見 不落有邊 不作無見 不落無邊 不作凡見 不落凡邊 不作聖見 不落聖邊 但無諸見 卽是無邊身 若有見處 卽名外道 外道者 樂於諸見 菩薩 於諸見而不動 如來者 卽諸法如義 所以云 <彌勒 亦如也 衆聖賢 亦如也> 如卽無生 如卽無滅 如卽無見 如卽無聞 如來頂 卽是圓見 亦無圓見故 不落圓邊 所以 佛身 無爲 不墮諸數 權以虛空 爲喩 圓同太虛 無欠無餘 等閑無事 莫强辯他境 辯着 便成識 所以云 <圓成沈識海 流轉若飄蓬> 祇道 <我知也 學得也 契悟也 解脫也 有道理也> 强處 卽如意 弱處 卽不如意 似者箇見解 有什 用處 我向汝道 等閑無事 莫 用心 不用求眞 唯須息見 所以 內見外見 俱錯 佛道魔道俱惡 所以 文殊 暫起二見 貶向二鐵圍山 文殊 卽實智 普賢 卽權智 權實 相對治 究竟 亦無權實 唯是一心 心且不佛不衆生 無有異見 有佛見 便作衆生見 有見無見常見斷見 便成二鐵圍山 被見障故 祖師 直指一切衆生 本心本體 本來是佛 不假修成 不屬漸次 不是明暗 不是明故 無明 不是暗故 無暗 所以 無無明 亦無無明盡 入我此宗門 切須在意 如此見得 名之爲法 見法故 名之爲佛 佛法俱無 名之爲僧 喚作無爲僧 亦名一體三寶 夫求法者 不着佛求 不着法求 不着衆求 應無所求 不着佛求故 無佛 不着法求故 無法 不着衆求故 無僧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스님께서는 지금 법을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僧)이랄 것도 없고 법(法0이랄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네 만약 가히 설명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성으로서 부처님을 찾는 것'이 된다. 나[我]란 것이 있다고 견해를 내면 곧 처소(處所)인 것이다. 법 또한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법이란 바로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마음의 법을 부촉할 때에 법이라 하는 법이 일찍이 무슨 법이던가.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으면 마음, 마음하는 법을 비로소 알리라.
실로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도량에 앉음이라고 한다. 도량이란 오직 일체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이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닫는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엔들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만약 이 소식을 안다면 유유자적하게 소요함인들 논할 바 있겠느냐.
問 和尙 見今說法 何得言無僧亦無法 師云 汝若見有法可說 卽是以吟聲求我 若見有我 卽是處所 法亦無法 法卽是心 所以 祖師云 <付此心法時 法法 何曾法 無法無本心 始解心心法> 實無一法可得 名坐道場 道場者 祇是不起諸見 悟法本空 喚作空如來藏 本來無一物 何處 有塵埃 若得此中意 逍遙 何所論
9. 한 물건도 없음[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신다면 한 물건도 없음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 깨달음이란 옳은 곳도 없으며 그렇다고 앎이 없는 것도 없다."
問 本來無一物 無物 便是否 師云 無亦不是 菩提 無是處 亦無無知解
10.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너의 마음이 부처이니라.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과 부처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 한다면,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시어 어떻게 그것을 전수하셨습니까?"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전한 것은 오직 마음의 부처이니라. 즉 너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가르쳐 주신 것이며,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조사라 부르느니라. 만약 곧바로 이 뜻을 깨닫는다면, 곧 3승의 모든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어서 본래의 부처인 것이니, 결코 점차로 닦음에 의지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그러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무슨 법을 말씀하십니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사 오로지 한 마음의 법만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하대가섭에게 그것을 은밀히 부촉하셨느니라. 이 마음법[心法]의 본체는 허공계를 다하여 온 법계를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이치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을 논하건대 너는 어찌 언어, 문자로써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한 기틀, 한 경계 위에서 결코 심법([心法)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니라. 이 하나의 문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하염없는 법의 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만약 깨쳐 알고자 한다면 다만 무심을 알아야 한다. 홀연히 깨치면 곧 되는 것이요, 만약 마음을 써서 배워 깨달으려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갈라진 마음과 모든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무와 돌 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도를 배울 분(分)이 있느니라." "지금 갖가지 망념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하여 없다고 하십니까?" "망념은 본시 본체가 없는 것인데, 너의 마음이 허망하게 일으킨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함이 없는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일으켜 다시 망념을 알려 하느냐? 네 만약 마음을 내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연히 망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네 지금 망념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런 가운데 망념이 없다면, 부처 또한 없느니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네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의 견해를 지어서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하며, 중생의 견해를 지어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모조리 너의 견해가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일체의 견해가 없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겠느냐? 마치 문수가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두 철위산 지옥에 떨어진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제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깨달음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났느냐? 일상의 어묵동정간에 모든 소리와 빛깔이 모두 불사(佛事) 아님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느냐?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며, 부리 위에 부리를 더하지 말라.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일 뿐이니라.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너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 허다한 일들이 있겠느냐?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니라. 허공세계가 밝고 깨끗하여 한 터럭만큼도 너에게 견해를 짓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소리와 빛깔들이 그대로 부처님 지혜의 눈이니라.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를 의지해야만 비로소 생긴 것이니, 경계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종일 말하나 일찍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종일 들으나 일찍이 무엇을 들었느냐?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일찍이 한 글자도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니라."
問 何諸是佛 師云 汝心 是佛 佛卽是心 心佛不異故 云 <卽心卽佛> 若離於心 別更無佛 云 若自心是佛 祖師西來 如何傳授 師云 祖師西來 唯傳心佛 直指汝等心 本來是佛 心心不異故 名爲祖 若直下 見此意 卽頓超三乘一切諸位 本來是佛 不假修成 云 若如此 十方諸佛 出世 說於何法 師云 十方諸佛 出世 祇共說一心法 所以 佛 密付與摩詞大迦葉 此一心法體 盡虛空 法界 名爲諸佛理 論這箇法 豈是汝於言句上 解得他 亦不是於一機一境上見得他 此意 唯是默契 得這一門 名爲無爲法門 若欲會得 但知無心 忽悟卽得 若用心擬學取 卽轉遠去 若無岐路心 一切取捨心 心如木石 始有學道分 云 如今 現有種種妄念 何以言無 師云 妄本無體 卽是汝心所起 汝若識心是佛 心本無妄 那得起心 更認於妄 汝 若不生心動念 自然無妄 所以云 <心生則種種法 生 心滅則種種法 滅> 云 今正妄念起時 佛在何處 師云 汝今覺妄起時 覺 正是佛 可中 若無妄念 佛亦無 何故 如此 爲汝起心作佛見 便謂有佛可成 作衆生見 便謂有衆生可度 起心動念 摠是汝見處 若無一切見 佛 有何處所 如文殊 起佛見 便貶向二鐵圍山 云 今正悟時 佛在何處 師云 問從何來 覺從何起 語默動靜一切聲色 盡是佛事 何處覓佛 不可更頭上安頭 上加 但莫生異見 山是山水是水 僧是僧俗是俗 山河大地日月星辰 摠不出汝心 三千世界 都來是箇汝自己 何處 有許多般 心外無法 滿目靑山 虛空世界 地 無絲髮許 與汝 作見解 所以 一切聲色 是佛之慧目 法不孤起 仗境方生 爲物之故 有其多智 終日說 何曾說 終日聞 何曾聞 所以 釋迦四十九年說 未曾說着一字
11. 보리의 마음
"만약 그렇다면 어느 곳이 깨달음입니까?" "깨달음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부처라 해서 역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라 해서 깨달음을 잃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몸으로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양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보리심을 냅니까?" "보리는 얻는 것이 아니다. 네 지금 얻음이 없는 마음을 내기만 하면, 결정코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대로가 보리의 마음이니라. 보리는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에 얻을 그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작은 법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일체 중생이 본래 보리이므로, 디시 보리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네 이제 보리심을 낸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을 가지고 배워서 부처를 얻는다고 말하여, 오로지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네가 3대아승기겁을 닦는다 해도 다만 보신, 화신의 부처만을 얻을 뿐, 너의 근본 연원인 참된 성품의 부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밖으로 구하는 모양있는 부처는 그대와는 닮지 않았도다'고 하였다."
云 若如此 何處是菩提 師云 菩提無是處 佛亦不得菩提 衆生 亦不失菩提 不可以身得 不可以心求 一切衆生 卽菩提相 云 如何發菩提心 師云 菩提 無所得 今但發無所得心 決定不得一法 卽菩提心 菩提 無住處 是故 無有得者 故 云 <我於燃燈佛所 無有少法可得 佛 卽與我授記> 明知一切衆生 本是菩提 不應更得菩提 今聞發菩提心 謂將一箇心 學取佛去 唯擬作佛 任 三祇劫修 亦祇得箇報化佛 與 本源眞性佛 有何交涉 故 云 <外求有相佛 與汝不相似>
12. 수은의 비유
"본래로 이미 부처일진대 어찌하여 4생과 6도가 있어 갖가지로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는 본체가 뚜렷하여 거기에 더 불어나고 줄어들 것이 없다. 또한 6도에 흘러들어도 곳곳마다 모두 원만하고, 여러 만물이 모두 낱낱이 부처이니라.
이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수은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흩어졌어도 방울방울이 모두 둥근 것과 같다. 나뉘지 않았을 때에도 한 덩이였을 뿐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라. 온갖 형상과 모습은 마치 집과 같다. 나귀의 집을 버리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늘의 몸이 되기도 하며,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집은 모두 네 자신이 취하고 버리는 곳이니라. 그래서 모든 구별이 있는 것이지만, 본래 근원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問 本旣是佛 那得更有四生六道 種種形貌不同 師云 諸佛 體圓 更無增減 流入六道 處處皆圓 萬類之中 箇箇是佛 譬如一團水銀 分散諸處 顆顆皆圓 若不分時 祇是一塊 此一卽一切 一切卽一 種種形貌 喩如屋舍 捨驢屋入人屋 捨人身至天身 乃至聲聞緣覺菩薩佛屋 皆是汝取捨處 所以有別 本源之性 何得有別
13. 무연자비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십니까?" "부처님의 자비란 인연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자비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問 諸佛 如何行大慈悲 爲衆生說法 師云 佛慈悲者 無緣故 名大慈悲 慈者 不見有佛可成 悲者 不見有衆生可度 其所說法 無說無示 其聽法者 無聞無得 譬如幻士爲幻人說法 者箇法 若爲道我從善知識言下領得 會也悟也 者箇慈悲 若爲汝起心動念 學得他 見解 不是自悟本心 究竟無益
14. 정진이란?
"어떤 것이 정진(精進)입니까?" "몸과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굳건한 정진이니라. 마음을 일으켜서 밖으로 구하기만 하면 '가리왕이 사냥놀이를 좋아함'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이 곧 인욕선인이며, 몸과 마음이 함께 없음이 곧 부처님의 도이니라."
問 何者是精進 師云 身心不起 是名第一牢强精進 起心 向外求者 名爲歌利王 愛遊獵去 心不外遊 卽是忍辱仙人 身心俱無 卽是佛道
15. 무심한 행
"만약 마음이 없으면 이 도를 행하여 얻을 수 있습니까?" "마음없음[無心]이 바로 도를 행함이거늘 거기에 다시 더 얻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느냐? 만약 잠깐이라도 한 생각 일으키면 곧 경계이고, 한 생각 없다 하여도 경계이니라. 망령된 마음이 스스로 없어지면 더 이상 쫓아가 찾을 것이 없느니라."
問 若無心 行此道得否 師云 無心 便是行此道 更說什 得與不得 且如瞥起一念 便是境 若無一念 便是境 妄心 自滅 無復可追尋
16. 삼계(三界)를 벗어남
"어떤 것이 3계를 벗어나는 것입니까?" "선과 악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곧 3계를 벗어나느니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3계를 부수기 위해서이다. 만약 모든 마음이 없다면 3계 또한 없느니라. 가령 작은 티끌 하나를 100등분 부수어 그 중 99등분을 없애고 한 등분만 남았더라도, 대승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 못된다. 100등분이 모두 다 없어야만 대승에 있어서 비로소 잘 벗어났다고 하느니라."
問 如何是出三界 師云 善惡 都莫思量 當處便出三界 如來出世 爲破三有 若無一切心 三界 亦非有 如一微塵 破爲百分 九十九分 是無 一分 是有 摩訶衍 不能勝出 百分 俱無 摩訶衍 始能勝出
17. 마음이 부처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불성이 있어서, 동일한 마음의 본체를 지녔느니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인도로부터 오셔서 오직 한마음의 법만을 전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곧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깨달음이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자기 마음을 알아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요,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 만약 말하지 않고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그렇다고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조사스님께서는 '참된 성품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지라. 인연에 호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나니, 방편으로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고 하셨다.
만약 인연에 호응하지 않을 때라도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바로 호응할 때라도 또한 종적이 없느니라. 이미 이런 줄 알았을진댄 '없음' 가운데 쉬어 깃든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니라.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하셨으니, 모든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뜻으로 반연하고 분주시 조작하는 마음이 6도에서 멈추지 못하여, 마침내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유마거사가 이르기를, '교화하기 힘든 사람은 원숭이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으로 제어한 다음에 비로소 조복시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일체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 천상, 지옥, 6도, 아수라가 모두 마음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심하기만 하면 모든 반연은 단박에 쉬게 되며 망상 분별을 내지 않으면 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욕심과 성냄도 없고, 밉고 고움도 없으며, 이김도 짐도 없느니라.
허다한 여러 가지 망상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니, 곧 깨달음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과 나란히 되는 것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나무먹이를 먹고 풀옷을 입는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라.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하며 모두 다 천마(天魔), 외도, 물과 뭍의 여러 귀신 노름을 하는 것이니, 이같이 수행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본래 몸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이어늘, 어찌 문자 속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지금 자기 마음을 알아서 사량분별하는 망상을 쉬기만 하면 6진의 번뇌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직 침상 하나만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니라. 지금 앓아 누워서 반연을 모두 쉬어 망상이 그쳐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보리이니라.
지금 만약 마음 속이 분분히 시끄러워 안정되지 않았다면, 너의 배움이 비록 3승, 4과, 10지의 모든 지위에 이르렀다 해도 아직 범, 성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함이 옳다. 모든 행위는 끝내 덧없음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힘이 다할 때가 있기 마련이니, 마치 화살을 공중에 쏘면 얼마 안 가 힘이 다해 땅에 도록 떨어지는 것처럼, 생사의 윤회에 다시 돌아가고 만다. 이와 같은 수행은 부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요, 헛되이 쓰라린 고초를 받을 뿐이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에 뛰어난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을 잘못 먹은 것이다'고 하였다.
단지 다니고 머물고 앉아 눕는 모든 시간 가운데서 오로지 무심함을 배우기만 하면, 분별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다. 종일토록 둥둥 떠오르는 가운데로 내맡겨 둔 것이, 마치 바보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모른다 하여도, 일부러 알리거나 모르게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마치 큰 바위덩이와 같아서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고, 일체 법이 너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여 올연히 어디에도 잡착함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조금은 상응할 분(分)이 있다 하리라.
3계의 경계를 툭 뚫고 지나기만 하면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는 것이며, 번뇌 없는 마음의 모습을 바로 샘이 없는 지혜[無漏智]라고 부른다. 인간과 천상업을 짓지 않으며, 그렇다고 지옥업을 짓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반연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곧 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결같이 나지 않음[不生]만은 아니어서, 뜻 따라 날[生] 따름이니라. 경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자기 뜻대로 나는 몸을 가졌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마음이 없음을 모르고 모양에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는 것은 모두 마구니의 업에 속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토의 수행[淨土佛事]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업을 짓는 것으로써, 이것을 부처의 장애[佛障]라고 하느니라.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가로막기 때문에 인과에 얽매여, 가고 머무름에 조금도 자유로움이 없다. 왜냐하면 보리 등의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치 누런 잎사귀를 돈이라 하여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무상정각이라 하나니, 지금 이미 이 뜻을 알았다면 어찌 구구한 설명이 더 필요하겠느냐? 다만 인연따라 묵은 업을 녹일 뿐이요,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마음 속은 밝고 또 밝기 때문에 옛 시절의 견해를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서 <유마경>에 이르기를 '가진 것을 없애 버린다'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는 '20년 동안 항상 똥을 치게 하셨다'고 하였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 지은 바 견해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희론(戱論)의 똥을 쳐서 없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본래 스스로 공적(空寂)하여 결코 한 법에라도 멈춰 머무르지 않으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나라도 또한 다 비었다'고 하셨느니라.
만약 부처님의 도를 닦아 배워서 얻는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전혀 맞지가 않는 것이다. 혹은 한 기연이나 한 경계를 보이기도 하며, 눈썹을 치켜 뜨기도 하고 눈을 부라리기도 하여 어쩌다 서로 통하기라도 하면 곧 말하기를, '계합하여 알았다'고 하며 혹은 '선의 이치를 깨쳐서 증득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도무지 아는 게 없다가 그 사람을 대하여 무슨 도리라도 얻게 되면 마음속이 문득 환희 하여 기뻐한다. 그러나 만약 상대에게 절복 당하여 상대보다 못하게 되면 속으로 섭한 생각을 품게 된다. 이처럼 마음과 뜻으로 배운 선(禪)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한낱 마음으로 헤아리는 법일 뿐이요, 우리 종문의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면벽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견처(見處)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도이나, 분별망상은 마구니의 경계이다'고 하였다.
이 성품은 네가 미혹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그렇다고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천진스런 자성은 본래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온 시방의 허공계가 바로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니라.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허공이란 본래부터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라 할 것도 인위적인 작위도 없으며,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다. 그래서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고 하였으며, 털끝만큼이라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의지하여 기댈 만한 것도 없으며, 달라붙을 것도 없다. 한 줄기 맑은 흐름이 자성의 남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이니, 어찌 머뭇거려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겠느냐! 참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할 줄 모르고, 진정으로 들음은 귀가 없으니, 뉘라서 들을 수 있겠느냐! 수고하였다. 편히들 하여라."
上堂云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 達磨 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 本來是佛 不假修行 但如今 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云何識自心 卽如今言語者 正是汝心 若不言語 又不作用 心體如虛空相似 無有相貌 亦無方所 亦不一向是無 有而不可見故 祖師云 <眞性心地藏 無頭亦無尾 應緣而化物 方便呼爲智> 若不應緣之時 不可言其有無 正應之時 亦無 跡 旣知如此 如今 但向無中 泊 卽是行諸佛路 經云 <應無所住 而生其心> 一切衆生 輪廻生死者 意緣走作心 於六道 不停 致使受種種苦 淨名 云 <難化之人 心如猿 故 以若干種法 制禦其心然後 調伏> 所以 心生 種種法 生 心滅 種種法 滅 故知一切諸法 皆由心造 乃至人天地獄 六道 修羅 盡由心造 如今 但學無心 頓息諸緣 莫生妄想分別 無人無我 無貪瞋 無憎愛無勝負 但除却如許多種妄想 性自本來淸淨 卽是修行菩提法 佛等 若不會此意 縱 廣學勤苦修行 木食草衣 不識自心 皆名邪行 盡作天魔 外道 水陸諸神 如此修行 當復何益 誌公 云 <本體是自心作 那得文字中求> 如今 但識自心 息却思惟妄想 塵勞自然不生 淨名 云 <唯置一牀 寢疾而臥> 心不起也 如今臥疾 攀緣 都息 妄想 歇滅 卽是菩提 如今 若心裸紛紛不定 任 學到三乘四果十地諸位 合殺祇向凡聖中坐 諸行 盡歸無常 勢力 皆有盡期 猶如箭射於空 力盡還墜 却歸生死輪廻 如斯修行 不解佛意 虛受辛苦 豈非大錯 誌公 云 <未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藥> 如今 但一切時中行住坐臥 但學無心 亦無分別 亦無依倚 亦無住着 終日任運騰騰 如癡人相似 世人 盡不識 亦不用敎人識不識 心如頑石頭 都無縫 一切法 透汝心不入 兀然無着 如此 始有少分相應 透得三界境過 名爲佛出世 不漏心相 名爲無漏智 不作人天業 不作地獄業 不起一切心 諸緣 盡不生 卽此身心 是自由人 不是一向不生 祇是隨意而生 經 云 <菩薩 有意生身> 是也 忽若未會無心 着相而作者 皆屬魔業 乃至作淨土佛事 皆成業 乃名佛障 障汝心故 被因果管束 去住無自由分 所以 菩提等法 本不是有 如來所說 皆是化人 猶如黃葉 爲金 權止小兒啼故 實無有法 名阿뇩菩提 如今 旣會此意 何用區區 但隨緣消舊業 更莫造新殃 心裸明明 所以 舊時見解 摠須捨却 淨名 云 <除去所有> 法華 云 <二十年中 常令除糞> 祇是除去心中作見解處 又云 < 除戱論之糞> 所以 如來藏 本自空寂 不停留一法故 經云 <諸佛國土 亦復皆空> 若言佛道 是修學而得 如此見解 全無交涉 或作一機一境 揚眉動目 祇對相當 便道 <契會也> <得證悟禪理也> 忽逢一人 不解便道 都無所知 對他若得道理 心中 便歡喜 若被他折伏 不如他 便卽心懷 □ 如此心意學禪 有何交涉 任汝會得少許道理 祇得箇心所法 禪道 摠沒交涉 所以 達磨面壁 者不令人 有見處 故 云 <忘機 是佛道 分別 是魔境> 此性 縱汝迷時 亦不失 悟時 亦不得 天眞自性 本無迷悟 盡十方虛空界 元來是我一心體 縱汝動用造作 豈離虛空 虛空 本來無大無小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無一物 亦無人亦無佛 絶纖毫的量 是無依倚 無粘綴 一道淸流 是自性無生法忍 何有擬議 眞佛 無口 不解說法 眞聽 無耳 其誰聞乎 珍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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