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극락정토로 가는 길♤

경허선사(鏡虛禪師) 선시(禪詩) 모음

白道 박만주 2020. 4. 30. 09:24




   



 경허선사(鏡虛禪師) 선시(禪詩) 모음 
 


 경허(鏡虛) 


 졸음


머리 떨구어 언제나 존다.

조는 일 말고 다른 일이 또 내게 없다.

조는 일 말고 다른 일이 내게 또 없기에

머리 떨구어 언제나 존다.

 

 산새는 아는가


일이 없는 것이 내 할일이라

문고리 닫아걸고

낮잠 속으로 덧없이 빠져들면

내 외로움을 산새들이 알았는지

그림자

그림자가 창앞을 지나간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선시(禪詩)의 최고봉, 이 땅의 선불교에 큰 충격을 던지고 간 불후의 선승(禪僧), 그가 바로 경허(鏡虛)다. 그는 184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출가하였다. 14세 때부터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세에는 승려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절의 강사(講師)가 되었다.


31세 되던 해 여름, 경허는 속세로 돌아간 옛 스승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가 도중에 전염병이 도는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밤이 늦어 잘곳을 찾는 그에게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이때 삶의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절실히 느껴 그 길로 여행을 포기하고 절로 돌아온 그는 강의를 폐지하고 문고리를 걸어잠근 채 3개월간 수행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방문앞을 지나가는 한 중이 '소는 소로되 콧구멍이 없는 무쇠소로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경허는 탄생과 죽음의 비밀을 홀연히 깨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처없이 각지를 떠돌면서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술에 잔뜩 취한 채 법당에 들어가 칼을 턱 밑에 대고 밤을 새우는 독특한 수행을 일삼았는가 하면, 모두 내쫓는 문둥이 거지 여인을 품에 안기도 했다.

 
그러다가 64세 때 갑산에서 제자들에게 예언했던 바로 그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하에서 만공, 혜월, 수월, 방한암 등 근세의 고승이 거의 다 배출되었다.


경허의 제자 만공(萬空)은 그를 두고 이렇게 썼다.

'그 사나움은 범보다 더하고 착함은 부처를 넘는다. 이것이 경허스님의 참모습이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취하여 꽃 속에 누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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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 허 鏡虛 : 1849∼1912


1894년에는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事)와 신설하는 수선사(修禪寺) 등의 불사에 법주가 되었다. 1904년에는 오대산 금강산 등을 두루 다니며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나한상의 개금불사에 중사로 참여하였다. 그해에 만공을 만나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나이 64세 법랍 56세에 입적했다.


그는 생애를 통해 선(禪)의 생활화 일상화를 모색했으며 대중 속에서 선(禪)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선문에서 정혜(定慧)가 원만히 갖추어져야만 견성(見性)이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염불문에서도 일심(一心)이 불란한 삼매경에서만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근대 선(禪)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로 평가된다.

 

경허(鏡虛, 1849∼1912): 성우(惺牛)

근대 불교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를 따라서 경기도 광주의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에게 출가했다. 계허가 환속하므로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동학사의 만화(萬化)를 찾아가서 경학을 배우고 내외경전을 두루 섭렵하여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23세 때 대중들의 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자 학인들이 사방에서 운집했다. 31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계허 대사의 은의가 생각나서 찾아뵙고자 떠났다가 문둥병이 치성한 마을을 지나칠 때에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는 즉시 귀사하여 학인들을 돌려보낸 후, 3개월 동안 철저하게 정진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20여 년간 홍주의 천장암, 서산의 개심사(開心寺),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등에서 때로는 참선으로 때로는 설교로 선풍을 크게 떨쳤다. 51세 때 합천 해인사로 옮겼는데 마침 국가에서 불경 간행과 수선사(修禪社)의 신설 사업을 명하매 대중이 법주로 추대하였다.


54세 때 범어사 금강암과 마하사의 개금불사가 있어 증명(證明)이 되었고, 56세 때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 안변의 석왕사에 이르러 5백나한 개금불사에 증명으로 참여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장발을 한 채 속가의 옷으로 행세하며 스스로 난주(蘭州)라 호하고 인연 따라 교화에 바치다 64세에 함북 갑산에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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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벌     偶吟


약산(藥山)의 三월 신선루(神仙樓)에 올라

살구꽃 복사꽃 만발하여 냇가에 퍼지고,

함께 작별한 하늘가 이 손이여

눈앞에 풍물도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는구나.


 

추 억     偶吟

 

당년에 여기에서 팔선녀와 놀았거니

선녀 간 뒤 놀 흥취 없어

유경루(有慶樓)만 남았는데

三십년 만에 다시 돌아온 객이

허덕허덕 천석(泉石)에 다다르니 슬픔만 서리네.

 

벗과의 작별     偶吟


석주(石州) 땅 三월 산루(山樓)에 오르느니

살구꽃 복사꽃 만발하고 도량물 졸졸 흘러

한 번 작별한 천애에 고독한 나그네

눈앞에 보이는 풍물 향수 더욱 깊어지는구나.


암 자     偶吟

 
물을 떠다 조밥을 지어 먹고

벼개를 높이 하여 편안히 누웠거니

풍부한 즐거움 암자의 하루 밤이 다정도 해라.

대도(大道)는 천진하여 말할 곳도 잊었는가

산동은 때마침 차를 달여 맑은 향기 나르네.



세간 만법     偶吟


세간사 만 가지가 뜨거웠다 서늘했다

어찌 그리 변하는고, 어떤 때는 둥글다가

어떤 때는 모가 나니, 온 누리 모든 중생

낱낱이 공하고 신령하여 통치 않는 곳 없도다.



괴나라 풍광     偶吟


불 속에 꿈틀대는 지네 당장 어쩔 줄 모르는데

가을 강 맑은 안개 백구는 한가롭네.

이 도리 진실로 아는 이 없어

괴 나라 진실로 아는 이 없어

괴 나라 풍광 꿈 속에나 전하리.


용 정 강     偶吟


용정강상에 이른 들늙은이

머리를 돌이킨 갈림길에

한 숨 지며 묻노니,

늙은이 말이 없고

산도 또한 저무는데

어느 곳인지 푸른 물

흐르는 소리 처량도 하여라.


선심시심     偶吟

글·경허·이종찬 옮김


벌레소리 찌르륵 찌르륵

배갯머리 달 밝은 가을

잎은 깊은 사원 속에 지고

바람은 묵은 시냇머리에 놀라다


생각 있으면 공연히 감동하나

무료하면은 오히려 수심을 더해

이렇듯 하루살이의 기탁 회고하면

역시 한 기운으로 수습해야 해.


蟲聲來     / 枕榻月明秋

葉下深院裡 / 風驚古澗頭


有思空自感 / 無聊轉添愁

顧此寄     / 亦當一氣收



※ 제목 : 鏡虛 大禪師 語錄.  


心月孤圓光呑萬像 光境俱忘復是何物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경허선사 성우(鏡虛禪師 惺牛) (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선사 행적


  출가


경허스님은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에서 송 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먼저 출가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한 백씨(伯氏)는 태허성원(泰虛性圓)스님이시다.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기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에 가서 계허(桂虛)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다.



그해 가을에 계허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을 찾아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료하고, 23세 적에 대중의 물망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함에 사방에서 학인들이 물처럼 몰려왔다.



  수행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여름 어느 날, 은사(恩師)스님을 뵈러 가시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시던 중 호열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셨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 빠르고 생사(生死)가 신속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집에 찾아가게 되었다.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스님에게 묻기를, "스님네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되면 소가 된다는데..."하는 말에 대꾸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이에 경허스님은 강원의 강백으로서 모든 학인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셨다.


영운(靈雲)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셨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달 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다



  깨달음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다.

이 때가 31세셨다.


오도(悟道)를 한 후, 송(頌)하시기를,

忽 聞 人 語 無 鼻 孔

頓 覺 三 千 是 我 家

六 月 岩 山 下 路

野 人 無 事 太 平 歌.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휴정(淸虛休靜)선사의 12세 손(孫)이며, 환성지안(喚惺志安)선사의 8세손이라고 밝히셨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전법


어느날 경허선사가 방에서 정진을 하고 계시는데 혜월스님이 문을 열고 당당하게들어왔다.선사께서 이미 간파하시고 물음을 던지셨다.


"목전(目前)에 고명(孤明)한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이에 혜월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 섰다가, 다시 서쪽에서 걸어와 동쪽으로 가서 섰다.

"어떠한 것이 혜명(慧明)인가?"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성인(一天聖人)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선사께서는 여기에서,

"옳고 옳다."하시며 혜월스님을 인가(認可)하셨다.


그 후 1902년경허선사께서는 혜월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付 慧 月 慧 明

了 知 一 切 法

自 性 無 所 有

如 是 解 法 性

卽 見 盧 舍 那

依 世 諦 倒 提 唱

無 文 印 靑 山 脚

一 關 以 相 塗 糊

水 虎 中 春 下 澣 日

萬化門人 鏡虛 說


해월혜명에게 부치노라

일체법 깨달아 알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기니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임인년 늦봄에

만화 문인 경허 설하다



  열반


스님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다.


시적(示寂) 그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바로 위에 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다.


心月孤圓光呑萬像

光境俱忘復是何物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스님과 혜월(慧月)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다.



경허선사 일화


1.배 위에서 노는 뱀


경허스님이 천장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 밤 만공 스님이 큰방에 볼 일이 있어 경허스님이 누워 계시는 그 앞으로 불을 들고 지나가다 얼결에 보니, 스님의 배 위에 길고 시꺼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었다. 만공 스님은 깜짝 놀라

"스님 이게 무엇입니까?"하니, 경허 스님이

"가만히 두어라. 내 배위에서 싫컨 놀다 가게."


하고는 놀라지도 않고, 쫓지도 않고, 그대로 태연히 누워 계실 뿐이었다.


얼마 후 선사의 법문이 있으셨다.

"이런 데에 마음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자기 공부에 정진해 가야 하느니라."



  2.법문은 술김에나 하는 것


경허스님께서 천장사(天藏寺)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선사께 찾아와서 불법(佛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그대로 앉아 계시며 일체 말씀이 없으시다가, 누구든지 곡차를 갖다 올리면 그 곡차를 자시고 난 후 법문을 종일이라도 하시었다.


만공(滿空) 스님이 그 손님들이 다 간 후 스님께 불평하시기를


"스님께서는 만인 앞에 평등하셔야 할 도인(道人)이신데 어째서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간단 명료하였다.


"이 사람아, 법문(法門)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것이지 맑은 정신으로는 할 게 못돼."


하고 한 마디로 잘라 대답하시니, 만공 스님은 이 법문에서 법의 깊이를 깨달았다.



  3.재 지낼 음식을 구경꾼들에게


경허스님이 천장암(天藏庵)에 계실 때 하루는 형님인 태허(泰虛)스님이 갈산 김씨네 49재가 있어 장을 푸짐하게 보아다가 부처님 앞에 고임새를 정성껏 고여 탁자에 진열해 놓았다. 구경꾼 아이들이 죽 와서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까, 경허 스님이 어디서 홀연히 나타나 큰그릇을 들고 법당에 올라가 차려 놓은 과종(果種)을 모조리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내려와 밖에 서 있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한 주먹씩 돌려 줘 재 지낼 탁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걸 본 태허 스님이 "재나 다 지낸 뒤 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다 갖다 주느냐?"


하시며 노발 대발하니, 경허 스님이


"이렇게 지내는 재가 바로 지내는 진짜 재입니다."


라고 하였다. 태허 스님은 할 수 없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새로 잿상을 봐 오게 하고, 재주(齋主)에게 미안한 사과를 하였다. 재주가 환희심을 내어


"우리 부친의 재는 참으로 잘 지냈습니다."


고 오히려 태허 스님께 경허 스님의 무애행(無碍行)을 깊이 존경하고, 재의 설비비용을 새로 내 놓았다.



  4. 모친을 위한 해탈법문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서 경허 스님이 그 모친을 위하여 법문(法門)을 한다고 대중을 모아 놓은 뒤 "우리 어머님을 모셔 오도록 하라."


하고 시자(侍者)에게 분부하였다. 시자는 그 뜻을 연만한 할머니께 전하며,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아드님의 법회(法會)에 가시기를 권하였고, 그 모친 되시는 할머니 또한 희색이 만면하여 옷을 갈아입고 대중이 모여 있는 큰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며 정성을 다하여 경의를 표하고, 자리에 앉으면서


"우리 경허가 나를 위해 법문을 설한다 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


하고 특별 법문을 청하였다.


그 때 스님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어찌된 셈인지 어머니를 맞이하여 부시럭부시럭 옷을 벗고,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이 되자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하고 그대로의 나신(裸身)을 보였다. 그 어머니는 무슨 심오한 설법(說法)을 자기를 위해 해줄 줄로만 알고 크게 기대하고 있다가 이 해괴한 것을 보고


"대체 무슨 법문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하고 크게 노하였다.

"별 발칙한 짓도 다하는구나!"


하고 크게 노하여 법석(法席)을 박차고 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이


"저래가지고 어찌 남의 어머니 노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아주 어려서는 이 몸을 벌거벗겨 씻기며 안고 빨고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하실까. 세상 풍속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군."


하고 짐짓 쓴웃음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모친은 노발대발하여

"그래, 나를 위해 법을 설한다고 하더니, 그게 무슨 짓이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며 좀처럼 노기를 풀지 않았다. 대중이 몰려가서 "할머니, 그게 바로 스님의 큰 법문이고 특별 설법입니다. 그러니, 어서 노여움을 푸십시오." 하며 거듭 빌어야 했다



  5. 무거운 쌀자루


어느 날 해질녁이었다.

경허 스님이 만공 스님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날도 탁발 성적이 매우 좋아서 스님들의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그러나, 흐뭇한 마음과는 달리 짐은 몹시 무거웠고, 갈 길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바랑 끈은 어깨를 짓눌러 왔고, 만공 스님은 걸음이 빠른 경허 스님의 뒤를 죽을둥 살둥 쫓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허 화상이  "내 빨리 가는 방법을 한 번 써 볼 터이니, 자네 빨리 와보게나."


마침 어느 마을을 자나가게 되었다.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마침 삽짝문이 열리면서 젊은 아낙네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왔다. 스무 살 갓 넘겼을까 말까 한 아주 예쁜 새댁이었다.


앞서 가던 경허 스님이 먼저 여인과 마주쳤다. 엇갈려 지난다고 생각되는 순간 경허 스님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여인의 양 귀를 잡고 입술에 번개같이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집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소동은 곧 이웃에 퍼지고, 급기야 동네 사람들은

"저 놈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작대기나 몽둥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들고 뛰어 나왔다.


"아니, 어디서 요망한 중놈이 나타나 가지고?!"


"어디, 맛 좀 보아라."


이렇게 소동이 번지자 스님은 두 말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쌀을 지고 뒤따라가던 만공 스님 또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함께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만공 스님은 온 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앞서 뛰어 가는 경허 스님을 따랐다.


몽둥이를 들고 뒤쫓던 사람들의 추격은 무서운 속력을 내어 달아나는 두 스님을 끝까지 쫓지는 못했다.


이윽고 스님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 가게 되었다. 마을을 벗어나 절이 보이는 산길에 접어 든 스님은 마침내 만공 스님에게 말했다.



"쌀자루가 무겁더냐?"


"아이고 스님, 무거운지 어떤지,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재주가 어지간하지? 그러는 사이에 무거움도 잊고, 먼길을 단숨에 지나 왔으니 말이다."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을 바라보고 흔쾌히 웃으며, 석양(夕陽)이 비낀 먼 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6. 상 여


어느 날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과 함께 먼길을 나섰다. 어느덧 한낮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길은 첩첩 산중이고 사람의 집은 눈에 띄지 않는데 시장기가 들기 시작했다. 굽이진 산길을 돌아 어느 산마루턱에 당도하였을 때, 저 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곳에 오색 깃발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상여의 행렬이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스님은 만공 스님을 데리고 장례 행렬 앞으로 다가갔다. 상여 앞에서 합장을 한 다음, 음식을 청했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더 있나요?"


한 상여꾼이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자, 스님은 태연히 말했다.


"술이 있으면 술을,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주시지요."


사람들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아따 참, 원 별 중들 다 보겠네."


어떤 사람은 빈정거리듯이 산 쪽을 보며 뇌까렸다.


점잖은 한 회장(會葬)꾼이 말했다.


"아니 대사(大師)가 어찌 술을 달라 하시오? 곡차라 하지도 않고."


스님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시장한데 한 잔 하면 되지, 굳이 다른 말할 게 뭐 있겠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다면??????


하고, 술 한 대접을 듬뿍 떠서 내놓았다. 막걸리였다. 경허 스님은 술잔을 받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잔이 너무 작습니다. 차라리 바가지나 동이째 주시오."


그러나, 기가 막히는 한편 기괴한 흥미를 느낀 군중의 한 사람이


"워디, 동이째 내 줘 봐."


하고 술이 가득 담긴 동이를 들어 경허 스님 앞에 내 놓았다. 스님은 그것을 단숨에 비워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상주(喪主)의 마음이 움직였다. 틀림없이 도(道)가 높은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장(喪杖)을 짚고 스님에게로 가서 공손히 물었다.


"무애행(無碍行)을 하시는 도가 높은 스님들 같사온데 스님들의 자비로움으로 망인(亡人)이신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스님은 느닷없이 큰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명당은 해서 뭐에 써? 죽으면 다 썩은 고기 덩어리밖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극진한 대접을 하느라 하면서도 이 말을 들은 상제들은, 별안간 주정꾼의 주사처럼 표변한 걸승(乞僧)의 말투에 어이가 없는데다 울화까지 치밀어 모두 달려 들 형세였다. 둘째, 셋째, 넷째 상제들이 우르르 몰려 들며 기세가 험악했다.


"아니, 워디서 떠돌던 중놈들이?


대막대기[喪杖]을 들어 당장에 후려칠 기세였다.


"네 이놈들!"


하며, 스님은 두 팔을 걷어 올리고 딱 버티고 섰다.


스님과 만공 스님은 모두 6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로 위세가 매우 당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뜻밖의 사태를 회장꾼들은 그저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때 맏상제가 흥분한 아우들을 헤치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스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장자(莊子)의 『남화경(悴ㅜ?』에도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까막까치나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미흡해서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손된 도리를 그렇지 못해서요."


상주는 행상길을 재촉해 떠날 차비를 했다. 잠자코 있던 경허 스님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할 뿐이니, 죽고 사는 것 원래 그러하므로, 만약 모든 것이 참으로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일세."


생멸(生滅)의 실상(實相)을 설(設)할 즈음에, 상여 행렬은 고개를 넘어갔다. 고개 너머로 상여의 구슬픈 소리가 암암히 바람결에 멀어져 가고 있었다.



  7. 밀씨와 파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이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적을 비롯한 안주 여러 가지를 정성껏 마련해 가지고 스님께 바쳤다.


마을 선비들과 술자리가 무르익은 뒤 옆에 앉아 있던 만공 스님이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넌지시 한 말씀 여쭈어보았다.


"스님, 저는 혹 술이 있으면 들기도 하고, 없으면 안 듭니다. 이런 파적도 굳이 먹으려고도 하지 않고,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는?."


할 때 경허 스님이 제자의 말을 끊으며 대꾸하기를


"허어, 자네는 벌써 그런 무애(無碍) 경계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지를 못하여 술이 먹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씨를 구하여 밀을 갈아 김을 매고 가꾸어 밀을 베어 떨어져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이렇게 먹을 테야.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하여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잘 가꾸어 이처럼 파적을 부쳐 가지고 꼭 먹어야 하겠네."


하였다. 이 말씀에 만공 스님은 등에서 땀이 나면서도 오싹해지고, 정신이 아찔하며 자기의 견해가 너무 얕고, 스님의 경지는 하늘같이 높아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스님의 무애 역행(無碍逆行)하시는 도리를 깊이 깨달았다.



 8. 음식에 넣은 독약을 털고


스님을 모시고 있던 관섭(寬燮)이라는 행자(行者)가 겪은 일이다.

그 관섭이 어린 속견(俗見)으로, 다른 법문(法門)은 다 좋지만 스님의 무애행(無碍行)하시는 것만은 마땅치않아 질색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스님의 곡차 심부름을 하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던 어느날 마침 안주를 사오라고 스님이 돈을 주자 시봉은 안주를 사고난 나머지 돈으로 몰래 비상(砒霜)을 샀다. 수도(修道)는커녕 술 심부름의 시봉(侍奉)을 하기도 몹시 귀찮은 마당에 비상이나 먹고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막된 생각으로 몰래 흉계를 꾸며 곧 비상을 쿵쿵 빻아서 구운 안주에 골고루 뿌려 넣었다.


그리고는 술과 안주를 스님께 천연스레 갖다 드렸다.


스님이 이것을 잡수려고 하는 터에 시봉은 막상 겁이 덜컥 나서 방을 빠져나가 뒷문에서 문구멍으로 숨을 죽이며, 스님의 동정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저걸 자시나 안 자시나. 드신다면 곧 쓰러질 게 아닌가. 충격적인 장면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보려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님은 곡차를 한 번 쭉 따라 드시고, 안주를 집어 잡수시기 시작하자 뭔가 버석버석 입안에 씹혀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씹혀지는 것만 차례로 골라 털어 버리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시기를 계속했다. 비상 마른안주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골라 털어 낸 뒤 남김없이 맛있게 끝까지 자시고는


"아, 참 잘 먹었다."


하시는 게 아닌가. 돌아가시기는 고사하고 비상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 무심 도인(無心道人)의 경계를 육안(肉眼)으로 지켜본 시봉은 기적 같은 일에 겁도 나고 무서워서 이 사실을 가슴 속 깊이 숨겨두고 있다가 후일에 만공 스님께 자진하여 지난 날 경허 큰스님께 저지른 일을 고백하여 참회를 하고 용서를 빈 일이 있다. 경허 스님은 비상인 줄을 알면서도 놀라지도 않고 끝까지 맛있게 다 자셨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 일도 전혀 없었다.


 

  9. 여자를 업고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길을 가던 한말의 대선사 경허 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수도승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스님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내었다.


"우리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젊은 처자가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노승 경허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경허는 선뜻 등을 내밀며 "그거 어려울 것 없소이다."라고 말했다.


경허는 처녀를 등에 업어다 건너편에 내려주고는 계속해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젊은 스님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젊은 스님은 자기의 스승 경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다. 마침내 젊은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하고 따지며 대들고 말았다.


젊은 제자의 화난 목소리를 듣던 경허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에끼 이놈!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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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일대기


적어도 조선말기에 선풍(禪風)을 일으킨 고승으로 경허(鏡虛) 선사를 꼽지 않을 사람은 몇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신 스님이시기에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다고 하겠는데, 주로 일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까 내용이 과연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에 해당하는지는 아무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미리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이러한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생각 해보시는 것이 좋겠다.



  1. 살아가신 과정 (行狀)


경허집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행상이 보이는데, 대략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속성은 광산김씨이고 이름은 상민(詳玟)이며 호는 서룡(瑞龍)이다. 증조부는 춘택공이고 사계(沙溪) 선생의 팔대 손이다. 인종(仁宗) 가경(嘉慶) 19년 갑술년에 서울에서 탄생했다. 어려서부터 청수하고 총명하였으며 17세에 종로에서 놀다가 벼슬아치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세상의 명리(名利)란 모두 화근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안성 청룡사에 들어가 영월(影月) 장로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19세에 지리산에 들어가니 그때 용악(용岳)장로가 안국사에서 강의를 크게 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 수하에서 경을 배우고 학업이 진취되자 용암(龍巖)화상을 찾아가 지견이 맑아졌다.


27세에 기양 성전(騎羊聖典)장로에게 입실하니 그때부터 도가 높아졌다. 그의 부탁으로 벽송암에 주석하여 퇴락한 암자를 중수하고 중흥시켰다. 또한 자기의 일(깨달음)을 밝히지 못함을 염려하여 칠불암에 올라가서 몇 해 동안 면벽참선을 하였다.


광서(光緖) 16년 경인년 12월 27일 작은 병을 얻어 29일에 열반에 들고자 하니 대중이 새해를 맞이해서 불공을 해야 하는데 지금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자, "내가 중이 된지 60년에 몸을 버리면서 어찌 삼보전에 방해롭게 하겠는가 걱정을 말거라 내가 내년 1월 2일로 연기를 하련다." 하니까 대중이 또 대중은 또 그때는 칠성계를 하는 날과 겹친다고 염려를 하자 다시 4일을 더 연기하여 巳時-오전 10시경- 가 되자 대중에게 묻기를 "오늘 가면 아무런 장애가 없겠는가?" 하니 대중이 "그렇습니다." 하자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는 대중에게 경을 외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는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이때의 세상 나이로는 78세요, 법랍, 즉 출가한 나이로는 60년이니 그의 열반은 온 총림이 슬퍼하는 일이 되었다.


이상이 요약으로 정리를 한 경허스님의 일대기였는데, 약간의 참고가 되셨기 바란다.



  2. 일화 들


경허 스님과 연결해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하는데, 그리 오래지 않은 년대를 살아가신 스님이어서기도 할 것이지만 그의 행적이 동서남북으로 막힘이 없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1) 주모와의 수작(酬酌)


제자를 데리고 만행을 다니는 도중에 목이 마른 대사는 주막에 들러서 식사를 하고 내친 김에 탁배기도 한 사발 벌컥벌컥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수다를 떠는 주모와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젖도 슬슬 만져보고 하셨던 모양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는 도무지 스승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배배 꼬여서 심술이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하늘같은 스승님께 달려들어서 뭐라고는 못하고 심사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놀다가는 대사가 제자를 보고 그만 가자고 독촉을 하여 자리를 털고 일이나서 휘적거리면서 길을 계속 가는 중이었다. 제자가 침묵으로 따랑오는데 스승이 보니 영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넌 어째 상판이 영 일그러져 있냐? 뭔 속상한 일이라도 있냐?"



"그야 스님 때문이지 왜 그렇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너보고 마음이 나쁘라고 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까 주막에서 그게 뭡니까. 체통좀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체통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주모의 가슴도 주무르고 음담패설도 하고 그러셨잖아요. 그게 다 음계와 구업을 지으시는 것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아실 스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스님의 곁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엉? .... 아하, 네 놈이 내가 혼자 노니까 열이 좀 받혔던 모양이구나. 허허허~"


"그게 아니지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시는군요. 비겁합니다. 그러시면...."


"아, 이놈아 음계는 네가 범하고 있구나."


"무슨 억지 말씀입니까요?"


"야 이놈아, 난 그 주막을 떠나면서 여인은 이미 잊어버렸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바보 같은 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놈아 세상 삼라만상은 그 마음에 흔적이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이미 흔적도 없는 허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느냔 말이다. 내가 그 여인과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에서 한 일이고 지금 이렇게 길을 가는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너는 늘상 흔들리는 마음으로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느니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분별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 분별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


이 대화의 내용에서 생각을 해보면 집착이 없으셨던 모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제자는 만공선사였을 가능성이 많겠는데, 원래가 만공은 경허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제자 만공스님도 또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겠는데, 우선은 경허스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 이 항목에서 해야 할 일이겠다.


그의 행동은 부처님의 계율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살아가는 행동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서 후에 경허가 불법의 행을 망쳤다고 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여하튼 행동을 보고 내리는 결정이라고 하다면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후세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그의 마음은 늘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처럼 그렇게 살아갔던 것으로 미뤄서 짐작만 해본다.



(2) 단청 불사


"만공아 단청불사를 해야 하겠다. 시주 받으러 가자."


"예, 스님."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시주를 받으러 가서 마을 집을 방문하면서 얼마간의 시주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날은 덥고 목은 말랐던 것은 미뤄서 능히 짐작이 되거니와, 길가의 주막거리에서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는 무슨 향기보다도 멋지게 풍겼을 것이다.


그래서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제자를 앞장세워서는 주막으로 간 다음에는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기분이 한참 좋았다. 그런데 제자 만공스님은 도무지 속이 꼬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뒤를 따라 가면서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님,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말이냐?"


"스님은 시주 돈을 받아서 술을 드셨으니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러고 말고요. 단청하라고 시주를 한 것은 법당에 칠을 하라고 준 것이지 스님이 술드시라고 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습니까?"


"녀석 참 뭘 모르네. 내 얼굴을 봐라 이놈아."


"술취한 모습이 참 가관입니다요."


"어허 녀석 단청불사를 볼 줄 모르네. 불그레족족~ 한 것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이놈아."


"그럼 스님 술드시려고 시주를 받았단 말입니까?"


"그랬다 이놈아. 목은 마르고 컬컬해서 한잔 생각이 났지 그런데 부처님이 영험하니까 이렇게 목도 축이고 기분좋게 길을 갈 수가 있지 않느냐. 그 부처님 참 영험하시기도 하지.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면 남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말합니다요."


"그렇겠냐?"


"그렇고 말고요."


"그렇다면 내가 왜 궤변을 늘어 놓았는지 지적을 해봐라."


"첫째로 스님의 몸과 법당은 다르단 말입니다."


"왜 달라?"


 "스님은 인간이지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아따 고놈 눈도 참 나쁘네."


"뭐가 말입니까?'


"이 놈아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야 말씀이고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


"고놈 참 인자 생각이 조금 트이는갑네."


다시 설명을 해주시지요. 스님."


"그래 잘 듣거라. 이 몸은 법당이요 이 마음은 부처이니라. 법당의 부처는 죽어있는 돌덩어리이고 법당은 돌덩어리를 지키는 집이라고 하느니라. 나는 내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했는데, 너는 죽은 부처의 법당에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니라."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럴싸 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을 해보라고 하지 않느냐."


"부처님은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님은 술을 드셨으니 이것이 또 문제란 말입니다."


"문제 되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보통의 화상들은 술을 먹으면 본성이 취해서 함께 흔들리지만 내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도 어디 한번 비틀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이 놈아. 술을 먹었다. 계를 범했다. 하고 맨날 고시랑거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부처가 기특하다고 수기를 줄 것도 아니고, 니 스스로 그 속박에 매일 뿐이란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지. 너 마음 쓰는 것을 보니 큰 중은 되겠지만 큰 자유인은 되기 어려울 상 싶다. 노력 많이 하거라.


대략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낭월이가 약간 각색을 해봤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는 승복을 벗고 속인으로 돌아가서 글방 훈장을 하셨다는 말도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오로지 경허 스님의 관심사는 자유로운 마음에 있었던가 싶고 불교인이라고 하는 큰 비중을 두지 않으셨던가 싶은 생각을 해 봤다.


일화를 보시면서 혹 경허 스님은 맨날 술만 마시고 살았던 화상인가 싶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실로 많은 절을 복원하고 정진을 하신 흔적도 많으므로 그냥 흥미로운 일화 정도로 생각을 하시면 되겠다. 경허 스님의 말씀 중에서 잘 알려진 것으로 참선곡이라는 노랙 있는데 함께 살펴보셔도 좋겠다.



  3. 마무리


이 외에도 많은 시와 글과 산문들을 모아서 경허집이라는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더욱 관심이 있으시다면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도송의 한 구절을 적음으로 마무리에 대신한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 경허스님 참선곡 佛法僧法佛 참 선 곡 (參 禪 曲)



경허선사 시편


  1. 참선곡


경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 만고 영웅 호걸 북망산(北邙山)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 없다. 황천객(黃泉客)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속에 등불이라.

 

삼계대사(三界大師)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사대

마음 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生死輪回) 영단(永斷)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

저 국토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 할 줄로 팔만장교(八萬藏敎) 유전이라.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 하랴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안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긱반(着衣喫飯) 대인접화

(對人接話) 일체처 일체시에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둥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부처

보고 듣고 앉고 서고, 잠도자고 일도하고

눈 한번 깜짝할제 천리 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나의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른데 물 찾듯이 육 칠십 늙은과부

외자식을 잃은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 생각

잊지말고 깊히궁구 하여가되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하여 폐침망찬(廢寢忘饌) 할 지경에 대오(大悟)

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생긴 나의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絶妙)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않고 늙도않고 크도않고 적도않고 본래생긴

자기영광(自己靈光) 개천개지(蓋天蓋地)

이러하고 열반진락(涅槃眞樂) 가이 없다.


지옥천당 본공(本空)하고 생사윤회(生死輪回) 본래없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맞아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忘却)하고

수연방광(隨緣放曠) 지내가되 빈배 같이 떠놀면서

유연중생(有緣衆生)제도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 아닌가?


일체계행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貧病乞人) 괄시(恝視)말고,

오온색신(五蘊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泰山)같이 써 나가세.


허튼 소리 우시게로 이날 저날 다 보내고 늙을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볼까?

죽을 때 고통중에 후회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는 듯

오장육부 (五臟六腑)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寒心慘酷)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뉘가 알꼬.

저지옥과 저 축생(畜生)에 나의 신세(身勢) 참혹하다.

백천만겁(百千萬劫) 차타(蹉 )하여 다시 인신 망연(茫然)하다.


참선잘한 저 도인은 서서죽고 앉아죽고 앓도않고 선세하며

오래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하며, 항하사수(恒河沙數)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逍遙)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에 눈 코를 쥐어 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當到)하니 포주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로세.

예전사람 참선(參禪)할제 마디 그늘 아꼈거는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뻗고 울었거는

나는 어이 방일한고.

무명업식(無明業識) 독한 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가니,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操心)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昏迷)한 이마음을 어이하여 인도(引導)할꼬.

쓸데 없는 탐심진심(貪心嗔心) 공연(空然)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고?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줄 모르도다.

내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 계행 (如干戒行) 소분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虛事)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仔細)보아 하루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할 말을 다하려면 해북서이부진(海墨書而不盡)이라.

이만 적고 끝내 오니 부디 부디깊이 아소.

다시 할 말 있아오니 돌 장승이 아이나면 그때에 말하리라.


  2. 태평가


세상사 모든 일을 홀연히 생각하니 한바탕 꿈이로다

주장자와 바릿대로 일대사를 깨치고자 깊은 산중에 들어가니

새소리 물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머루다래 덩굴들이 천길이나 높은 솔에 백번이나 얽혔는데

그 틈에 터를 잡아 두어간 띠 집 짓고

뜻 맞는 벗과 함께 어떤 때는 풍월 읊고

어떤 때는 향 피우고 고요히 앉았으니

모든 망상 사라지고 한 생각 깨끗하여

세출세간 모든 이치 분명히 드러나니

이 세상에 으뜸가는 훤출한 대장부라


무근초 불습수를 배불리 먹은 뒤에

천지삼라 만상을 모조리 인가하고

재(灰)머리 흙 얼굴로 꽃 피고 새 우는 곳,

훨훨 뛰어다니면서 나나리 나나리로 태평가를 불러보세


춤 산조 (07:20)원장현/ 대금 소리


출처 :윤경재 원문보기▶   글쓴이 : 화타

 

 ROMA 09.01.26 20:10 http://cafe.daum.net/rhrmawnd14/Dsc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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