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점수의 내용 :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지눌에 있어서 닦음은 깨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닦음은 항상 깨침을 전제로 하는 오후의 수이다. 그러면 깨친 후의 닦음의 원리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 혹은 정혜등지(定慧等持)이다. 선정(禪定 )과 지혜(智慧)는 본래 계, 정, 혜 삼학의 덕목으로 일반적으로 닦아 이루는 것이며 단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계율은 신구의의 삼업을 잘 지키어 방비지악(防非止惡)하는 것이며 선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여 조용하게 하고 지혜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셋은 단계적인 것으로 계에 의하여 선정을 얻고 선정에 의하여 지혜를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가 삼학의 일반적인 이해이며 {단경}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수의 북점종이 가르치는 삼학이다. 이러한 삼학은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닦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마음을 깨끗이 하는 닦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거울에 앉은 먼지를 닦아 내듯이 마음의 때를 부지런히 없애는 것이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이것이 신수 북점종의 마음 공부의 요체이다. 지눌은 이러한 삼학을 수상삼학(隨相三學) 혹은 수상정혜(隨相定慧)라고 부른다. 상을 따라 닦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하여 지눌은 훨씬 다른 차원의 삼학을 말한다. 그것은 자성삼학(自性三學) 혹은 자성정혜(自性定慧)라 불리는 것으로 지눌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잘못 없음이 자성계(自性戒)요, 마음에 산란함 없음이 자성정(自性定)이며, 마음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혜(自性慧)이다.]
이는 혜능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의 삼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며 하나인 마음 그 자체의 작용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씩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이다. 한마음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지눌이 보는 선정과 지혜도 혜능에서처럼 마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선정과 지혜는 바로 마음의 성상(性相), 즉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두 바탕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마음의 공적한 본체를 말하며 지혜란 마음의 영지한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선정과 지혜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으로 분리되어질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본체가 있으면 작용이 있고 작용이 있으면 본체가 있듯이 선정이 있으면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선정 또한 있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한 마음이이 때문이다. 지눌이 말하는 정혜쌍수니 정혜등지니 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본래 성품을 기본으로 하여 나오는 자연스런 표현인 것이다.
삼학에 관한 신수와 혜능, 점문과 돈문의 차이는 지눌의 표현대로 하면 바로 수상삼학과 자성삼학의 차이이다. 전자가 단계적이며 닦음이 있는 유위의 노력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본래 모습을 가리킬 뿐이요 무위의 수인 것이다. 지눌은 혜능과 마찬가지로 수상삼학은 열등한 닦음으로 깨침이 없는 점문의 것이라 하고 자성삼학은 깨침이 있은 뒤의 삼학이라고 구분한다. 즉 깨침 이전의 정혜는 정과 혜가 쌍수가 못되고 선후가 있는 닦음이며 깨친 이후라야 비로소 쌍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닦음은 정과 혜가 등지요 쌍수인 닦음이다.
수상정혜(隨相定慧)― 점문(漸門)의 수(修) : 유위유심(有爲有心) : 상(相)을 따르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 선정과 지혜가 선후가 있음 : 깨 침을 통하지 않은 닦음.
자성정혜(自性定慧)― 돈문(頓門)의 수(修) : 무위무심(無爲無心) : 마음에 卽한 선정과 지혜 :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 깨침 을 통한 닦음.
지눌의 오후수인 점수는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자성정혜의 수라야 한다. 그는 돈문의 입장에 서 있고 점수가 오후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후수인 점수에 자성정혜와 수상정혜를 함께 포용하는 원융성을 보인다. 그 까닭은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도 수승한 근기의 사람은 자성정혜로 닦을 것 없는 닦음[無修而修]이 있을 뿐이나 그렇지 못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오후에도 대치하는 수상문 정혜의 원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성정혜를 닦는 사람은 돈문에서 노력 없는 노력으로 병운쌍적(?運梔寂)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문 정혜를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대치하는 노력으로 마음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니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나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수상문의 대치함을 아울러 논한 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이다. 왜냐하면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가지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지눌의 원융한 자비 방편문으로 원효 이래 통불교적인 전통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수상정혜를 닦으며 또 어떤 사람이 자성정혜를 닦을 것인가? 먼저 수상정혜를 닦아야 할 경우를 보자.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번뇌의 습기는 무거워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어 선악의 경계를 대하여 동요함과 고요함이 서로 엇갈림을 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번뇌를 버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육근이 대상세계를 거두어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모두 공하여 비추어 보아도 미혹이 없음을 지혜라 한다.
이것이 비록 수상문의 정혜로써 점문의 하등한 근기의 수행이나 대치함에 있어서는 이들이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들뜨는 마음이 심하면 먼저 선정으로 이치 그대로 산란함을 거두어 잡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심하면 지혜로써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고 비추어 보아 미혹이 없게 하여 본래의 지각에 합하게 해야 한다.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기(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상태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대상을 대하여도 생각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합하여 그러한 대로 두 가지를 닦아야 바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무사인(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상문의 정혜를 닦아야 할 사람은 첫째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거운 반면, 관행은 약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 있는 사람, 둘째 무명은 깊고 지혜는 적어서 선하고 악한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담담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 즉 이러한 사람들은 수승한 근기가 못되는 사람으로 반연을 잊고 마음을 쉬는 수상정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이 수승한 근기인양 모든 노력을 하지 않는 일은 만용이며 과대망상으로 지눌은 특히 이러한 사람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닦음에 자상한 것이다. 실로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을 제시치 않고 있으나 지눌이야말로 혜능의 돈문에 서면서도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점문의 닦음까지도 차용하는 방편을 시설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오후(悟後)의 수상문 정혜는 비록 점문의 수행을 차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전(悟前)의 단순한 점문의 수행과는 전연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돈오후의 닦음인 것이므로 깨침을 즉한 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수와는 달리 자성에 대한 의심이 없는 진수(眞修)이며 단지 점문의 수를 일시적인 방편으로 쓸 뿐인 것이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를 빌려서 잠깐 습기를 다스리지만 이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는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물들은 수행[汚染修]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이 깨치기 전에 있으면 비록 잊지 않고 노력하여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키어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언제나 앞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치하는 노력이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대상이 편안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한다.]
깨침 이전의 닦음과 이후의 닦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지눌에 의하면 깨침 이전의 닦음은 물들은 닦음, 즉 오염수라는 것이다. 오염수란 무엇보다도 깨침이 없으므로 근본적인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는 닦음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여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에 빠져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깨침은 마음의 근본 바탕을 투철히 보는 것이므로 그럴 때 의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바로 부처요, 번뇌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임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침이 부재할 때 근원적인 의심은 계속 남아 있게 마련이고 이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은 채 닦는 것이 오염수이다.
잘못된 [나]라는 생각으로 물들었고 닦는다는 생각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념(無念) 무심(無心)이 될 수 없고 항상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불안한 채로의 닦음이다. 이러한 닦음은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이 기껏해야 임시적인 치유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치유가 못된다. 그러므로 지눌은 이런 오염수는 참다운 닦음이 못된다고 힘주어 말하다.
그러나 깨친 후의 닦음은 비록 점문의 닦음을 빌려쓰더라도 그것은 깨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참다운 닦음[眞修]이다. 비록 산란과 혼침을 대치하는 노력의 방편으로 빌려쓰지만 깨친 뒤의 닦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침이 있으므로 의심이 없고 따라서 [나]라는 생각에도 물들음이 없다. 또한 이러한 닦음은 번뇌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쳤으므로 번뇌를 끊되 끊음이 없는[無斷而斷] 무위의 닦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지눌은 오전의 수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오후수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후의 닦음에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수상정혜를 살펴보았거니와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자성정혜란 어떠한 것인가?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세 가지 느낌[三受]까지도 빈 사람은 자성정혜를 의지하여 자유롭게 함께 닦으면 천진하여 조작이 없으므로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이어서 자연한 이치를 이룰 것이니 어찌 수상문 정혜의 대치하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깨친 후에 ①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며, ②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꾸지람,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여덟 가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 ③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세 가지 느낌에도 마음이 조용한 사람은 수승한 근기로 자성정혜를 닦을 뿐이다.
자성정혜란 본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한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일상생활 그대로가 닦음일 뿐 특별한 시간과 장소, 노력이 필요한 닦음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혜능이 말하는 돈수며 일행삼매와 다르지 않다. 혜능의 특성이 [頓悟頓修 亦無漸次]로 점문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면 지눌의 특성은 오후 수에도 각인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닦음의 길을 제시함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점수의 두 가지 형태인 수상정혜와 자성정혜, 그리고 어떠한 근기의 사람이 그들 수행을 각기 필요로 하는가를 고찰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지눌이 말하는 점수가 자리행(自利行)에만 그치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지눌은 오후의 닦음이 결코 자리행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오후 점수의 문은 다만 더러움을 닦는 것만이 아니요 다시 만행을 겸해 닦아 자타를 아울러 구제하는 것인데 지금의 참선하는 이들은 모두 "다만 불성만 밝게 보면 이타의 행원(行願)은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목우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성을 밝게 본다는 것은 다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나와 남의 차별이 없음을 보는 것이니 거기서 다시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한갓 고요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화엄론에서도 "지혜의 성품은 다만 고요함이기 때문에 서원으로 지혜를 보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기 전의 미혹한 자리에서는 비록 어떤 서원이 있어도 마음의 힘이 어둡고 약하기 때문에 그 서원을 성취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깨달은 뒤에는 차별지로 중생들의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어 제 힘과 분수를 따라 보살의 도를 행하면 각행(覺行)이 점점 원만해지리니 어찌 기쁘고 유쾌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지눌의 오후수가 적정에 떨어지는 안일한 것이 아니라 세찬 이익중생(利益衆生)의 보살행을 겸하는 자타겸제(自他兼濟)의 실천임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수의 두 가지 수행 즉 휴헐망심(休歇妄心)하는 자리행과 중선(衆善)을 실천하는 이타행을 수심의 정(正)과 조(助)로 함께 겸해야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진심직설}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오후 이타행은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며 건지려는 자비행이며 이는 대소 모든 근기의 사람에게 두루 통하는 실천이며 닦음이다. 지눌이 보는 닦음을 깨침을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전의 수(修) : 점문
깨침 : 돈오 이후 : 돈문의 점수[진수眞修]
수상정혜(隨相定慧)[오염수汚染修]
① 자리행(自利行)
자성정혜(自性定慧)―수승한 근기
수상정혜(隨相定慧)―열등한 근기
② 이타행(利他行)
모든 근기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는 사실상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대소근기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돈오+자성정혜의 수승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체계는 사실상 혜능이 강조하는 돈오돈수와 다름이 없다. 이때의 돈오점수는 돈문이 가장 높은 길이며 따라서 [돈오]는 단순한 해오(解悟)의 경지가 아니라 증오(證悟)의 차원에로까지 승화된다. 반면에 돈오+수상정혜 지도체계는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접화하는 길로서 이때의 점수는 점문의 수행을 가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돈오 역시 해오에 가까운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에 있어서 돈오를 일괄해서 해오로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 내용을 무시한 무리한 평가이다.
이 대목은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눌이 {절요}에서 징관과 종밀의 돈점문을 고찰하고 나서 [만일 그 깨침이 철저한 깨침이라면 어찌 점수에 걸리겠으며 또 그 닦음이 진실한 닦음이라면 어찌 돈오를 떠나겠는가? 그러므로 문자를 떠나고 이치를 잡아 이름과 말에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설파한 깊은 뜻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돈문과 점문에 방해되지 않는 융통성을 가졌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그의 위인문의 충정에서 체계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문자 자체에 구애되기보다는 중인을 인도하기 위한 그의 산 정신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의 돈오점수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