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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심이문’과 빛과 어둠

白道 박만주 2012. 11. 15. 10:32

 

  2.‘일심이문’과 빛과 어둠


  1) 일심이문(一心二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핵심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대승’(大乘)과 ‘기신’(起信)에 있다. 이 논서에 의하면, 여기서 ‘대승’, 즉 ‘큰 수레’(Mahāyāna)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절대 진리이며, 그것이 다름 아닌 ‘중생의 마음(衆生心)’이다. 중생의 마음이 ‘생사의 세계’(世間法)와 ‘생사를 넘어선 세계’(出世間法)의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는 절대 진리 자체라는 것이다.


이 마음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진여(眞如)의 문(門)’과 ‘생멸(生滅)의 문(門)’이다. ‘진여의 문’이란 중생의 마음이 지닌, 본래 한결같고 변화가 없는 본체의 측면이고, ‘생멸의 문’이란 말 그대로 생멸변화하는 현실적 마음의 측면을 말한다. 일체의 번뇌를 떠난 진여(眞如) 그 자체로서의 측면이 중생심의 본체라면,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흔들리며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중생심의 측면을 ‘생멸문’으로 나타낸 것이다.


왜 본체상 진여 자체인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동요하며 육도(六道)에 윤회하는가? 그것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무명은 인간의 원초적 어둠과도 같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굳이 이 무명의 기원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 무명이 스며들면서 생멸변화를 일으킨다는 안타까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염법훈습’(染法薰習)이라 표현한다. 염법훈습이란 본래 순수함 자체인 ‘하나인 마음’(一心)이 현실적으로 동요하게 되는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현실적 동요에서 하나인 마음의 본래적 순수함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무명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기 보다는, 중생이 그 본래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일으킴(起信)으로써 극복해야 할 미망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무명은 진여에 근거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와 다른 것도 아니다. 생멸문은 미망의 세계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여로서의 중생의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별도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깨치지 못한 미망의 세계 역시 본래 대승 자체인 중생의 마음에 근거해 있고, 거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멸문이라 하지만, 그 본체는 진여이며, 따라서 생멸문에도 현상계를 포섭하는 ‘깨달음의 세계’(覺)가 이미 들어있는 셈이다. 이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는 중생의 마음을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 생멸변화에 의해 더러워진 듯 하지만, 마음의 본성은 본래 여래와 같음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러기에 중생 안에는 그 생멸변화에 상관없이 ‘여래성’이 부여되어 있다. 깨달음의 세계가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이미 들어있는 깨달음의 세계, 이것이 중생심의 본체론적인 측면, 즉 ‘진여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문으로서의 마음과 생멸문으로서의 마음이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닷물과 파도, 진흙가루와 옹기의 관계와도 같다.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두 바닷물 바로 그것이듯이, 반죽되고 빚어지기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옹기들이 생겨나면서도 진흙가루이기는 마찬가지이듯이, 진여와 생멸은 모두 중생의 ‘한 마음’(一心), 즉 궁극적 실재의 이중적 표현인 셈이다.



출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경점이다,, 원문보기 글쓴이 : 행인

 

글쓴이: 장명등

08.09.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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