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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길

白道 박만주 2014. 4. 5. 09:50

 

 

 

 

                                                                                                                

  수행의 길

티벳불교에는 수행의 방법만큼이나 다양한 종파와 부파(副派)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수행의 근기와 방법상의 차이 일뿐, 그들의 목표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티벳불교의 모든 종파와 부파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그러한 길을 몸소 보이셨던 분입니다.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모든 전도된 인식의 벽을 부수고 기나긴 정신적 수행의 과정을 거쳐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여 아직도 무지의 벽에 갇혀있는 많은 중생들을 돕는데 일생을 바치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일생을 그대로 닮아가려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행(修行, bhavana, bsGom Pa)이라는 용어가 요즈음에 와서는 명상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됩니다. 명상(瞑想, meditation)이라는 말은 ‘바른 관념이나 개념’이라는 뜻으로 깊은 정에 들어 바르게 사유한다(靜慮)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보통 마음을 가라앉히고 완전한 것에 대한 관상(觀想, visualization)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명상은 사성제(四聖諦) 무상(無常) 무아(無我) 등 현상계의 본성을 직관하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방식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명상의 개념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교 수행이라고 하면, 단순히 명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나 염불(念佛) 같은 다양한 방법들이 펴괄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보이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길은 명상을 포함한 모든 수행의 방법들을 아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실질적인 수행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달라이 라마께서는 “수행은 수행의 대상과 마음을 서로 익숙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작도 없는 시간 속에 살아 온 중생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전도된 생각에 물들어 수많은 생을 오고 가면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지은 다양한 원인(因)과 조건(緣)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불교적인 가르침을 탐구하거나 그와 관련한 다양한 상징으로 이루어진 수행의 대상이 마음에 익숙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여 어둠 속에 갇혀있는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행위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수행은 수행자의 거친 의식을 재구성하기 위한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통은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를 치유하려면 먼저 자신의 전도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이 전도된 생각을 전환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을 집착(貪) 성냄(瞋) 어리석음(痴)의 삼독(三毒)과 같은 정신적인 왜곡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티벳불교의 다양한 수행 방법들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정신적 왜곡을 바로잡고 전환(轉換, transformation)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심에 가득 찬 사람을 보면, 스승은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를 이끌어 줍니다. 물론 사랑과 자비가 분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과 자비를 자꾸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분노는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집착이나 욕망이 아주 강한 사람에게는 윤회하는 모든 현상계의 무상함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지금의 돈과 권력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소 빠르고 느린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제 아무리 풍부한 재물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평생을 가리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많은 재물로도 끝내 찾아오고야 마는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무상의 진리를 항상 깨어서 관(觀)함으로서 세속적 욕망의 왜소함을 경험하고 궁극적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적 수행에 대한 갈증이 일어나고 직접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수행

불교를 수행하는 하는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고(苦) 무상 죽음 같은 윤회의 기본적인 특성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실제하지 않음에 대한 통찰인 공성(空性)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수행은 단순히 병리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적으로 아주 강한 욕구를 가진 수행자는 주로 이 세상이 해골로 가득한 곳임을 관상합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중생은 결국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몸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모습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시체가 부패해 가는 과정을 하나씩 그려 봄으로써 그 모습이 현재 살아있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어 언젠가는 만나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때때로 화장터나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행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장소가 죽음에 관한 수행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성이나 건장한 남성의 몸이 매력적이라면 그들의 썩어가는 시체도 역시 매력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 시체도 혐오감만을 줄 뿐입니다. 결국 아름다움이나 매력이라는 것은 생각으로 지어낸 것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일상의 삶에서 조차 모든 사람을 다 썩어가는 시체로 보고 혐오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수행은 너와 내가 결국에는 다 스러져가는 존재임으로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등성을 개발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 쉽게 욕망에 이끌리고 마는 인간의 속성을 감안한 극단적인 처방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잘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역시 이와 같은 수행은 자신의 평정심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죽음에 관한 수행은 모든 중생이 다 똑같은 존재라는 평등 의식을 갖게 하며, 매력이나 혐오 같은 감정이 다 집착이나 실제를 바로보지 못하는 전도된 생각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선정(四禪定)과 사무색계(四無色界)

티벳불교에는 수행에 관한 수많은 문헌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수행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의 경지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선정(四禪定, bSam gTan bZhi Pa)과 사무색계(四無色界, 혹은 四無色定, 無色四等至, gZogs Med sNyoms 'Jug bZhi)는 생각을 가진 존재들인 유정(有情)의 세계이자,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미세한 단계들을 설명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이 단계까지는 수행자의 인식 능력이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는 경지입니다. 이 사선정(四禪定)과 사무색계(四無色界)는 불교의 수행에만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유사한 수행을 담고 있는 비불교도의 수행에도 있는 경지이며, 비불교도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이기도 합니다.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단계로 이루어진 사선정(四禪定)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이루어진 윤회계 중에 색계에 해당합니다. 수행자가 여러 가지 수행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욕계의 거친 의식들을 넘어서게 되면 보통 그 보다 좀 더 미세한 상태의 의식인 초선의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초선의 경지를 성취하고 나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수(享受)할 줄 아는 지복(至福)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음의 세 단계인 이선 삼선 사선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칩게 됩니다. 다만 이전의 단계보다 그 다음 단계가 좀 더 미세한 경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향수와 지복은 초선과 이선의 처음 두 단계에에만 나타납니다. 삼선의 단계에서는 향수가 사라지고 지복만 남습니다. 또 삼선의 단계에서 평정의 상태를 이루게 되면, 사선의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선의 단계에서는 지복마저 사라지고 평정으로 가득해 집니다. 이렇게 수행의 과정에서 향수와 지복이 점점 제거되는 것은 향수와 지복 역시 결국 평정을 이루는 장애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색계(四無色界)는 무색사등지(無色四等至) 혹은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단계는 윤회계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무색계에 상응하는 수행의 경지입니다. 이를 ‘등지(等至)’라고 부르는 것은 수행자의 관심이 외적인 대상에서 완전히 멀어져 마음과 정신의 모든 요소가 다 수행의 대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각각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혹은 有頂天)가 있습니다.

공무변처는 마음속에서 형태로 인식되던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속성이 없는 무한한 공간을 인식하는 하는 경지입니다. 식무변처는 좀 더 미세한 수준으로 의식의 속성을 분별하지 않는 무한한 의식의 상태입니다. 이 수행은 주로 지(止, samatha)와 관련한 것으로 분별의식이 사라지고 무한성 속에 머무는 의식을 말합니다. 무소유처는 모든 것을 식(識 혹은 마음 그 자체)으로 인식하던 경지를 넘어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계들 역시 앞의 단계보다 뒤의 단계가 더 미세합니다. 계속해서 네 번째 경지에 이르면 모든 조악한 분별이 사라지고 극히 미세한 분별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를 상(想)이 거의 없는 상태라고 해서 비상비비상처라고 부르며, 유정 세계의 가장 윗자리라고 해서 유정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세계는 극히 미세한 분별만을 가진 상태에서 행복도 불행도 없는 무한한 수명의 경지를 일군 이들이 도달하는 무색계의 최고 단계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윤회의 세계로 그 인연이 다하면 다시 돌고 돌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지도 만족할 수 있는 단계로 보지 않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는 다면 결국 다시 윤회의 굴레에서 돌고 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경지들은 마치 막다른 골목의 끝에서 잠시 쉬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불교가 바라는 최종의 목표는 다시는 윤회에 들지 않는 초세간적인 깨달음입니다. 그러려면 완전한 부처의 경지를 이루거나 최소한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독각(獨覺)이나 아라한(阿羅漢)의 경지를 이루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관(止觀) 수행

일반적인 사람들은 잘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 때문에 항상 산만하고 혼란스러워서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잘 속으며 그만큼 쉽게 전도된 생각 속으로 빠져듭니다. 반면에 수행이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불교의 수행자인 경우에는 계행에 밝고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 있으며 윤회하는 이 현상계 만족스럽지 못한 속성과 그 무상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지(止)와 관(觀)을 수행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 수많은 경전과 스승들의 전통이 있습니다. 지와 관을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수행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며, 원하는 만큼 그 본래의 성품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티벳 불교의 경전들에도 지와 관을 개발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수행의 방식이나 과정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티벳 불교의 4대 종파 중에 하나인 겔룩빠(dGe Lugs Pa)의 방식을 살펴보면, 이 종파에서는 주로 쫑카빠(Tsongkhapa) 대사의「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Lam Rim Chen Mo)」과 까말라실라(Kamalasila)의「수차중편(修次中篇, sGom Rim Bar Pa)」등의 구조에 따라 수행을 합니다.

이외에도 일반 현교(顯敎, Sutra) 전통의 대승 경전에서도 지와 관은 모든 수행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해심밀경(解深密經)의 분별유가품(分別瑜伽品)」이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지관문(止觀門)」에서는 지와 관에 대한 수행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와 관을 수행하는가 하면, 일체의 희론(戱論: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전도된 견해)에 의한 외부 현상의 경계를 가라 앉혀 없애는 것을 지라고 하며,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환하게 보는 것을 관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지와 관의] 수행이 각각 따로 이루어지지만, 점차적으로 자연스럽게 둘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된다.”(云何修止觀門. 謂息滅一切戱論境界. 是止義. 明見因果生滅之相. 是觀義. 漸次增長. 至于成就任運雙, 대승기신론 지관문 중에서)

지(止)를 지라고 부르는 것은 지를 수행함으로써 마음의 모든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한 곳에 마음을 고요히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止)를 닦는 법

지를 수행하는 데는 몇 가지 선행조건이 있는데,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1)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얻기에 용이하며, 맹수나 적을 피할 수 있고, 질병이 많지 않으며, 좋은 도반이 있으며, 조용하고 한가한 곳]의 자섯 가지가 잘 갖추어진 곳에 머물고,
(2) 탐욕이 적으며,
(3) 만족할 줄 알아 세상에 너무 친근하지 않고,
(4) 여러 가지 번잡한 활동을 피하며,
(5) 계율을 청정히 하고,
(6) 탐욕과 분노심을 모두 버려야 한다.

지는 어떠한 방해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원하는 만큼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지의 상태를 이루기 위해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집중력을 키우고 마음의 장애를 정화하기 위한 것이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수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지를 이루는 데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해 요소가 있습니다. 즉 침몰(沈沒, Bying Ba, 가라앉음)과 방일(放逸, rGod Pa, 흐트러짐)입니다. 침몰은 수행 중에 내적으로 너무 가라 앉아 명료함이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방일은 이전에 욕망의 경계(欲界)에서 경험한 것들이 자꾸 일어나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산란(散亂, rNam Par gYeng Ba) 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즐거웠던 기억을 포함하여, 마음의 안정을 해치는 모든 요소를 말합니다. 이외에도 마음의 안정을 해치는 요소에는 도거(掉擧, rNam Par 'Phyir Ba, 들뜸) 혼침(昏沈, rMugs Pa, 무기력) 수면(睡眠, gNyid Pa, 졸음) 등이 있습니다.

침몰과 방일은 집중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본격적인 수행은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고 나서야 가능해집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 침몰과 방일을 잘 점검하는데 집중해야 나중에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침몰과 방일이 일어나면, 그에 반대되는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즉 침몰이 오면 집중하고 있는 수행의 대상을 좀 더 밝고 크게 관해야 하며, 방일이 일어나면 죽음과 무상 들을 관하거나 집중하고 있는 수행의 대상을 줄이거나 어둡게 하고, 수식관(數息觀, 호흡이 들고 남을 관하는 방법) 등을 통하여 대처하도록 해야 합니다.



구주심(九住心)

주심(住心)이란 수행에 들어 간 상태에서 가라앉히는 마음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1) 내주심(內住心) (2) 속주심(續住心) (3) 안주심(安住心) (4) 근주심(近住心) (5) 조복심(調伏心) (6) 적정심(寂靜心) (7) 최극적정심(最極寂靜心) (8) 전주일경심(專注一境心) (9) 평등주심(平等住心)의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1) 내주심(內住心)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생각들에 이끌리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 안으로 집중하는 마음에 의지하도록 조건을 형성(攀緣)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오직 수행만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전환하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에 더 친밀해짐으로써 계속해서 수행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2) 속주심(續住心)이란 앞에서 잡아 놓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3) 안주심(安住心)은 수행의 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져 마음이 흐트러지고 산란해진 상태를 속히 발견하여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란했던 시간 보다 더 길게 집중하도록 하는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4) 근주심(近住心)은 편안한 상태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힘을 보다 강하게 일으킴으로서 망념(妄念)으로 인해 마음이 산란함해 지거나 침몰이 올 때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즉 항상 의식의 가까이에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5) 조복심(調伏心)은 침몰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관찰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바른 삼매에 든 공덕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로움을 봄으로서 힘을 불어 넣습니다.

(6) 적정심(寂靜心)은 침몰을 막기 위해 활성화 된 마음이 과하여 방일(산란) 해질 때, 그것을 가라앉히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죽음과 무상 그리고 산만해짐으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관함으로서 이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7) 최극적정심(最極寂靜心)이란 미세한 수준에서 침몰과 방일이 일어나는 것을 극복함으로써 정진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앞에서 훈련한 수행으로 인해 더 이상 침몰과 방일의 위험은 없으나, 이를 통하여 좀 더 빠르게 침몰과 방일의 상태를 제어 할 수 있게 됩니다.

(8) 전주일경심(專注一境心)이란 자연스럽게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여도 흔들림이 없는 강한 집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지속적인 삼매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9) 평등주심(平等住心)은 앞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수행의 대상에 대한 집중이 인위적인 작용을 하지 않고도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안(輕安, Shin Tu sByang Pa)

구주심(九住心)의 단계에서, 수행을 통한 정(定)이 익숙해 졌으며, 침몰과 방일의 장애가 제거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경안(輕安)’이라고 부르는 맑고 명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경안은 마음의 작용(心所)을 나타내는 말인데, 침몰과는 상대되는 개념으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경쾌한 상태를 말합니다. 경안(輕安)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각각 (1) 정신적 경안(마음의 경안), (2) 물리적 경안(몸의 경안), (3) 물리적 경안의 지복, 그리고 (4) 정신적 경안의 지복이 있습니다.

정신적 경안은 전에 했던 부정적인 행위들의 결과로 인해 미세하게 남아 있는 부정(不淨)한 성질들을 제거 하는 정신적인 요소입니다. 이를 제거함으로써 경쾌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고, 이는 성공적인 선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리적 경안은 ‘물리적인 피곤함이나 다른 좋아하지 않는 물리적 기능들이 제거되어, 특별히 경쾌한 유형(有形)의 상태입니다.’ 이는 침몰에 반대되는 선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물리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이렇게 물리적 정신적 경안이 일어나는 것과 함께,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 가볍고 경쾌한 기운을 느끼는 지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의식과 함께 하는 지복을 ‘물리적 경안의 지복’이라 하며, 정신적 의식과 관련된 지복을 ‘정신적 경안의 지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정(不淨)한 성질들이 지워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관(觀)을 닦는 법

마음에 부정(不淨)한 속성들을 극복하고 나면, 수행자는 자신의 몸과 조복(調伏)받고 마음대로 제어 할 수 있게 됩니다. 부정한 것들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평정과 안정을 얻는 것은 물론이요, 정신적 경안으로 인한 깊은 행복감에 젖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의 마음은 완전히 평화로워 지는데, 이러한 상태를 지(止)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止)는 관(觀)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평정을 위한 수행과 분석적인 수행을 동시에 병행해야 합니다. 지(止)만을 먼저 발달시켰을 때, 분석적인 수행을 하는 동안 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은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이를 지관쌍수(止觀雙修)라 합니다. 반복적인 수행을 통하여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같은 비율로 유지 되도록 수행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수행자는 관(觀)의 대상을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으로 바꾸고, 그것의 속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윤회의 현상계가 본래 공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으며,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상호 의존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는 자성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대한 수행의 대상에 자신을 끊임없이 친숙하게 함으로써 수행자는 점차적으로 자성(自性)을 나타나게 하는 힘을 약화시키고, 인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의 공성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수승한 관(觀)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높은 차원의 관(觀)은 수행자의 분석적 수행 그 자체가 마음의 평정 상태를 일으키고, 정신적 물리적 경안과 결합할 때 일어납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외부 경계(境界)로 나타나는 모든 대상들의 본성을 이해하는 지혜와 평정의 강력한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止)와 관(觀)이 조화롭게 하나의 의식이 되면, 번뇌를 제거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공성을 직접적으로 체득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잠재적인 도구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지관의 합일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도(五道: 資粮道, 加行道, 見道, 修道, 無學道)’ 와 ‘십지(十地)’ 등 단계적 수행절차를 거치게 되면, 수행자는 완전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명상 수행의 다양한 방법들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먼저 이상의 기본적인 수행이 잘 선행 되어야 여러 가지 방편 수행들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를 통하여 모든 중생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부처의 행을 하고자 하는 보리심을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수행을 하는 최종 목적입니다. 이제 이러한 수행의 길을 좀 더 구체적 대승의 길과 금강승의 길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극락정토로 가는 길 (白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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