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행증(信解行證)
불법의 교전(敎典)에서 설하는 내용은 무릇 그 실천(行持)을 말할 때, 신(信, 믿음), 해(解, 이해), 행(行, 수행), 증(證, 증득)의 네 글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라 하였습니다.
신(信)이란 신심(信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보살의 계위(位次)에 초신(初信)에서 십신(十信)까지 있는데, 신(信)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여래의 묘법은 일언반구도 모두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언어로서 아주 확실한 것이며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하며, 마음 밖에서 허겁지겁 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성인이 가르치신 말씀을 믿어 망령되게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해(解)라는 것은 몸 움직이고 마음 쓰는 것이 이제(二諦, 진(眞)과 속(俗))의 원융이어야 하며, 자기 스스로 알고 나서 변화시켜 설법하되, 모두 자기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며, 큰 밝음을 내놓아 일체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분명히 이해했다 하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으니, 그래서 입으로는 외고 마음으로는 생각하여(口而誦 心而惟), 마음과 입이 상응하며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지만, 뱃속에 탐진치만(貪嗔癡慢)이 가득하다면 이런 말은 빈말이며 결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릇 말을 하되 가르치신 말씀에 의지하여 하며, 몸 움직이고 마음 쓰는 것이 여기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면 비로소 언행에 어그러짐이 없다 하겠습니다. 만약 말을 하면 하늘 꽃이 분분히 떨어지지만, 행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면, 말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행(行)에는 내행(內行)과 외행(外行)이 있는데, 내외가 상응해야 합니다. 내행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두 가지 집착을 끊는 것이고, 외행은 온갖 착한 행동입니다.
증(證)이라는 것은 참된 실체를 실제로 증득하는 것입니다. ‘신’이 있고, 해’가 있어도 ‘행’이 없으면 ‘증’할 수 없으니, 이것을 미친 증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설법하는 사람이 소털처럼 많지만, 불법을 행하는 이가 어느 선사, 법사인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얼마간의 전장(典章)을 주해하는데, 『심경(心經)』, 『금강경』, 『팔식규구송(八識規矩頌)』 내지 『능엄경』을 그렇게 합니다.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은 다만 핵심을 요약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을 주해했다 할지라도 실천이 오히려 일개 속인보다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먹을 때 배부르게 먹지 말라고 말하지만 동작 행위는 내행과 외행이 나누어집니다. 내행은 정혜(定慧)가 원융해야 합니다. 외행은 사위의(四威儀) 중에 계법(戒法)을 엄수하여, 털끝만큼도 범하는 것이 없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수용(受用)할 수 있고, 그 위에 몸소 실천 해낼 때, 비로소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