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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黃檗)의 일진법계(一眞法界)

白道 박만주 2016. 10. 18. 09:05

 

 
 

                           황벽(黃檗)의 일진법계(一眞法界)         


 




 

글쓴이 : 무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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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황벽(黃檗)의 일진법계(一眞法界)


황벽(黃檗)의 어록(語錄)을 통칭하여 『전심법요(傳心法要)』라 하는데, 그 제목에 걸맞게 내용의 대부분이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전심법요』는 마조계(馬祖系) 조사선(祖師禪)의 심성관에 관하여 가장 풍부한 해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 그 기록자가 선승(禪僧)이 아니고 배휴(裵休)라는 유학자(儒學者)이기 때문에 일반적 선어록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전심법요』에서 마음에 관한 황벽의 설명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을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하나는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하는 것을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마음의 본질을 밝히는 심성관(心性觀)에 해당하고, 후자는 마음을 깨닫는 길에 관한 것으로서 공부법(工夫法)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공부법에 관해서는 다음 제6장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황벽의 심성(心性)에 관한 설명을 『전심법요』에서 찾아 그 주요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일심법(一心法) :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일심(一心)일 뿐 그 밖에 다른 법(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중생이다.


②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안팎의 모든 경계는 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③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 : 이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늘 두루 밝게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식작용(識作用)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뒤덮히는 까닭에 밝은 본체는 보지 못한다.


④즉금작용심(卽今作用心) : 바로 지금 말하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만약 말하지 않고 또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심체(心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장소도 없다. 그러나 오로지 없기만 한 것은 아니고 있긴 하지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⑤허공심(虛空心)과 일진법계(一眞法界) : 이 하나의 마음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아서 없는 곳이 없으나, 생멸(生滅)․유무(有無)․형색(形色)을 벗어나 있으므로 무엇이라고 헤아려 보거나 말로 나타낼 수는 없다. 또 허공과 같은 마음은 유일(唯一)한 진법계(眞法界)이다.

 


⑴ 일심법(一心法)


『전심법요(傳心法要)』의 첫머리에서 황벽(黃檗)은,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일심(一心)일 뿐 다시 다른 법(法)은 없다.”라고 하여 일심법(一心法)을 천명한다. 그리고는 곧,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부처가 바로 중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조록(馬祖錄)』의 시중(示衆) 첫부분에서 마조가 곧바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 말하고, 달마(達摩)가 중국에 와 전한 것이 일심법(一心法)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과 꼭 같다. 황벽도 또한,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래로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고 한 법만을 전했다.”라 하여, 달마 이래의 중국 선종이 일심법을 정통으로 이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일심법(一心法)의 내용은 곧 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황벽은 또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일승도(一乘道)라고도 한다.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성품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만약 삼승교(三乘敎)에 의거한다면, 불성(佛性)이 있고 중생성(衆生性)이 있다고 말하므로, 드디어 삼승(三乘)의 인과(因果)가 있게 되어 같고 다름이 있는 것이다. 만약 불승(佛乘)과 조사(祖師)가 서로 전함에 의거한다면, 이러한 일은 말하지 않고 오직 일심(一心)이 있을 뿐, 같거나 다름․원인과 결과 등은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직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을 뿐 둘도 없고 셋도 없다. 다만 부처의 방편설(方便說)은 제외한다.⌋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심법(一心法)은 황벽에 와서 다시 분명하게 천명되고 있다.


⑵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지법문(心地法門)

일심법(一心法)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견해(見解)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또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다. 이 점도 황벽이 마조의 견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황벽이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의미는 예컨대, “마음이 생기면 여러 가지 법(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여러 법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일체의 제법(諸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지며, 나아가 윤회(輪廻)의 길인 육도(六道)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짐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삼계유심(三界唯心)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황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도 말한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함은, 만법(萬法)이 모두 이 마음에 의지하여 건립되므로 경계(境界)가 나타나면 마음이 있다고 하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 도리어 경계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마조록』에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는 것인데, 남악회양(南嶽懷讓)이 마조에게 법(法)을 전할 때, 그 전하는 법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시중(示衆)에서 마조는 일심법(一心法)을 말하면서 달마(達摩)가 『능가경(楞伽經)』을 인용하여 중생(衆生)의 심지(心地)를 확인시켰다고도 말하고 있다. 또 백장도 심지(心地)를 언급하고 있으며, 뒤에서 보겠지만 임제(臨濟)도 자신의 법(法)을 심지법(心地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조사선(祖師禪)의 심성설(心性說)을 달리는 심지법(心地法)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황벽이 말하는 심지법(心地法)의 기본적인 의미는 위에서 보다시피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⑶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


황벽은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아무 모습이 없다고 한다. 마음 스스로가 아무 모습이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마음은 어떤 모습이라도 수용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이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어떤 모습이든지 비출 수 있고, 허공(虛空)이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어떤 모습이든지 수용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텅 비어서 아무 모습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텅 비었기 때문에 무슨 모습이든지 수용 가능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황벽의 말을 보자.


"바로 이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은 중생․부처․세계․산하․모양 있는 것․모양 없는 것과 더불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두루하여 일체가 평등하니 나다 너다 하는 모양이 없다. 이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늘 두루 밝게 비추거늘,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단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見聞覺知]을 마음이라고 여긴다.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에 뒤덮히는 까닭에 밝은 본체(本體)는 보지 못한다. 다만 바로 무심(無心)하면 본체는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올라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면 다시는 막힘이 없는 것과 같다."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 항상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밝게 비추는데도 사람들이 이 청정심(淸淨心)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상(相)에 가로막혀서 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내용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견문각지에 덮힌 마음은 염오심(染汚心)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염오심(染汚心) 즉 견문각지(見聞覺知)에 의하여 나타나는 상(相)을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마음이 없어져야 본래의 청정심(淸淨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마음을 없애는 것을 황벽은 무심(無心)이라고 하는데, 무심은 곧 황벽의 수행법(修行法)이다.

 


⑷ 즉금작용심(卽今作用心)


이처럼 황벽이 일심법(一心法)과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통하여 말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허공(虛空)처럼 무상(無相)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고, 하나는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식작용(識作用)으로 드러나는 유상(有相)한 마음이다. 청정한 본심(本心)이 심체(心體)라면 견문각지의 식작용은 심용(心用)이다.


그러면 견문각지(見聞覺知) 즉 육식(六識)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마음이라고 알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 대한 황벽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아는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만약 말하지도 않고 또 작용(作用)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럴 때에도 없다고만 할 수는 없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하여 나타나는 상(相)을 마음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그러나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작용(作用) 즉 상(相)을 나타내는 작용은 상(相)으로 파악할 수는 없으나, 상(相)을 드러내는 보다 근원적인 그 무엇으로서 분명히 진실(眞實)한 것이다. 견문각지를 통하여 나타나는 상(相)은 견문각지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러한 상(相)을 만드는 견문각지라는 작용(作用)이 있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작용은 근원(根源)이고 나타나는 상(相)은 말단(末端)이다.


또 작용은 모습은 없으나 끊임 없이 계속되는 항상(恒常)한 것이고, 겉으로 나타나는 상(相)은 작용에 따라서 순간 순간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이란 작용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작용이 없다면 본원청정심의 심체(心體)는 마치 허공(虛空)처럼 모양도 장소도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마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다만 마음이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인식되기 위해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작용하여 나타나야 한다. 이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작용을 통하여 그 이면(裏面)에 있는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곧 상(相)을 통하여 비상(非相)인 청정심(淸淨心)을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황벽은 마음이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작용하여 식(識)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음은 파악될 수가 없다고 한다. 작용하지 않는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아서 모양도 방소(方所)도 없으므로 파악할 단서(端緖)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마음의 이러한 성격은 허공(虛空)의 성격과 꼭 같다. 그래서 황벽은 마음을 주로 허공(虛空)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처럼 마음을 허공과 같다고 하는 것은 황벽(黃檗)의 심성설(心性說)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이제 허공과 같은 마음 즉 허공심(虛空心)에 관해서 살펴보자.



⑸ 허공심(虛空心)과 일진법계(一眞法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황벽(黃檗)의 심성설(心性說)에서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음을 허공(虛空)과 같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황벽의 심성관(心性觀)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허공과 같은 마음 즉 허공심(虛空心)을 잘 파악해야 한다. 황벽이 마음을 허공(虛空)에 비유하는 방편(方便)을 사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을 통하여 마음을 파악케 하려는 의도가 있다. 즉 마음을 깨달으려면 어떤 견해를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황벽이 마음을 허공에 비유함으로써 가르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마음은 허공처럼 무한하다. 마음은 생멸(生滅)․유무(有無)․형상(形相)․신구(新舊)․대소(大小) 등 모든 사려분별과 언어의 상대적 한계를 벗어나 있다.


② 마음은 허공처럼 무형상(無形相)이므로 사려분별로써는 알 수가 없다. 마음을 알고자 생각을 움직여 사려분별한다면, 이것은 곧 관념(觀念)의 상(相)을 만드는 것으로서 유형상(有形相)한 의식(意識)에 속하는 것일 뿐이고, 허공같은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생각으로써 마음을 파악할 수는 없다.


③ 마음은 허공처럼 무형상(無形相)이므로 막히거나 장애됨이 없다. 마음은 허공처럼 무형상이고 청정(淸淨)한 만큼, 어떤 의식(意識)과 어떤 경계(境界)에서도 장애됨이 없다. 중생은 눈앞의 경계(境界)와 의식(意識)에 집착하여 스스로 장애를 일으키지만, 본래 마음은 허공과 같으므로 그 무엇에도 장애되지 않는 것이다. 온갖 관념의 의식(意識)이 출몰하더라도 마음은 불변(不變) 그대로이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마음은 한가지이다.


④ 허공과 같은 마음을 깨달으려면 모든 분별의식(分別意識)의 상(相)을 버리고 집착을 없애야 한다.


⑤ 허공과 같은 마음은 곧 영각성(靈覺性)이다.


⑥ 허공과 같은 마음은 유일(唯一)한 진법계(眞法界)이다.


허공(虛空)은 없는 곳이 없다. 생멸변화하는 삼라만상과 일체의 작용은 허공과 함께 이루어 진다. 그러나 허공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삼라만상은 허공 속에서 생겨나고 허공 속에서 사라지지만 허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허공은 어떠한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만법(萬法)은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만법은 생멸변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허공은 생멸변화 속에 있지 않으므로 허공에는 시간이 없다. 모양을 가진 만법은 서로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크기로 어디에 있다는 크기와 위치와 방향이 있다. 그러나 모양 없는 허공은 관계지을 만한 그 무엇도 없으므로 크기도 위치도 방향도 없다.


허공은 텅 비어서 아무 모양도 없지만, 모양 있는 만법은 허공에서 생겨나 허공 속에서 변화하여 허공으로 사라지므로 허공이 만법의 근원이며 만법을 낳는 어머니이다. 만법은 허공 속에서 생멸하고 허공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허공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만법은 허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양 있는 만법이 곧 허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허공과 만법의 관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관계이다.


비록 허공과 만법의 관계가 이러하지만, 허공의 본질은 아무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모양을 갖춘 만법의 측면에서는 허공을 바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만법이 없으면 허공을 허공이라고 할 수도 없다. 허공이란 만법에 상대하여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있으면 허공도 있고 만법이 없으면 허공도 없다. 즉 만법과 허공은 이름은 둘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만법과 허공이 하나이므로, 만법이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만법이다. 그러나 만법과 허공은 이름도 다르고 뜻도 다르다. 결국 명칭과 뜻에 따라 분별하여 보면 만법이 있고 허공이 있어서 각각이 다르지만, 명칭과 뜻을 떠나 그 본질을 알고 보면 만법과 허공은 같은 하나로서 만법이니 허공이니 하는 명칭은 불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비유하여 설명하면 바로 이 허공과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허공은 삼라만상과 허공 자신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은 삼라만상과 마음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마음은 인식과 깨달음의 주관(主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황벽은 마음을 영각성(靈覺性)이라고도 한다.


"이 영각성(靈覺性)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허공과 같은 수명으로서 생겨난 적도 없었고, 사라진 적도 없었고, 있은 적도 없었고, 없은 적도 없었고, 더러운 적도 없었고, 깨끗한 적도 없었고, 시끄러운 적도 없었고, 고요한 적도 없었고, 어린 적도 없었고, 늙은 적도 없었고, 방향이나 장소도 없고, 안팎도 없고, 숫자로 셀 수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이나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으니, 찾을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고, 언어로써 나타낼 수도 없고, 경계를 통하여 알 수도 없고, 노력하여 도달할 수도 없다. 모든 불보살과 일체의 살아 꿈틀거리는 중생이 모두 이 큰 열반성(涅槃性)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 영각성(靈覺性) 즉 주관(主觀)이 삼라만상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세우고 그 삼라만상의 일부로 자기를 확인하면 이것을 자아(自我)라고 한다. 이러한 자아는 이른바 중생(衆生)의 마음으로서 삼라만상이 자기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삼라만상의 일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뒤집혀진[顚倒] 마음이라 하고 속고 있는[迷惑] 마음이라 한다. 이 주관인 마음이 삼라만상이 자기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허공과 같은 자기 자신 즉 마음 자체를 돌이켜 볼 때[廻光返照]를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아서 허공과 같은 마음의 본체를 알게 되면 부처라 한다.


그런데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습 있는 삼라만상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감각이나 알음알이[知解]로는 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마음이 인식 불가능한 것이라면 마음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마음을 안다는 것은 삼라만상을 인식하는 주관이 인식하는 주관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주관 스스로는 아무 모습이 없으므로 인식의 객체가 될 수는 없으나, 인식하는 작용은 있으므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확인을 스스로와 하나가 된다[契合]고 한다. 마음의 체(體)는 허공과 같아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인식하는 작용이 스스로를 확인하는 길 뿐이다.


마음을 허공에 비유한다면 허공과 그 작용인 삼라만상의 관계가, 마음에서는 인식 주관인 마음과 인식대상인 경계(境界)와의 관계가 된다. 경계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의 모두 즉 18계(界) 혹은 오온(五蘊) 등 만법(萬法)을 말한다. 즉 감각적인 것이든 의식(意識)적인 것이든 인식되는 모든 것을 일컬어 경계(境界)라 한다. 이와 같은 경계는 모두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고 사라진다.


즉 모든 경계는 마음과 함께 생겨나고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 마음 자체는 아무 형체가 없으므로 생겨나거나 사라지지도 않으니 시간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크기도 위치도 방향도 없으므로 공간으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관념이야말로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감각적 대상과 의식적 관념은 마음의 작용으로 마음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감각적인 형태이든 관념적인 형태이든 형태를 지니고 인식되는 모든 것들을 경계(境界)이다.


이들 경계의 생멸 변화에 의하여 시간이 정해지고, 이들 경계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서 공간이 정해진다. 따라서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관념은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경계이다. 그런데 경계는 감각적인 형태이든 관념적인 형태이든 형태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지만, 마음은 허공과 같이 어떠한 형태도 없으므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식되느냐 마느냐 하는 면에서 보면 경계와 마음은 같지 않다. 그러므로 경계를 인식하는 것처럼 마음을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깨닫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식하는 마음 곧 주관이 스스로의 식작용(識作用)을 돌이켜 봄으로써 스스로를 확인하는 길 뿐이다. 만약 마음이 주관으로서 스스로 식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확인할 길은 없다. 결국 확인하는 마음이나 확인되는 마음이나 모두 작용하는 마음이다. 마음의 체(體)가 허공(虛空)과 같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의 작용이 스스로를 확인하고서 하는 말이다.


마음이 인식하는 모든 경계는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이지만, 작용 그 자체는 어떠한 모양도 없다. 모든 경계는 작용의 결과가 아님이 없으므로 작용과 경계는 한 몸이고 둘이 아니다. 여기서 마음의 작용이란 곧 식작용(識作用)을 말한다. 모든 경계는 마음의 식작용의 결과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식작용을 하는 마음 곧 주관(主觀)으로서의 마음을 영각성(靈覺性)이라 하고, 이 식작용에서 그 식작용이 멸(滅)한 텅빈 마음을 확인하므로 열반성(涅槃性)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마음과 경계의 관계는 식작용과 그 작용의 결과 드러나는 식내용의 관계이므로 마음과 경계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일체(一切)는 유심조(唯心造)라고 하고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과 경계는 둘이 아니고 하나로서 같지만, 주관으로서의 마음이 스스로의 식작용(識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객관으로서의 경계만을 인식하고 자신을 잊는다면, 마치 거울이 자신의 비추는 작용은 잊고 자신에게 나타나는 영상을 실물로 착각하는 것처럼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도(顚倒)된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참된 자기는 형태도 없고 생멸도 하지 않아서 시공간(時空間)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시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용인데도, 중생은 작용의 결과 식(識)으로 드러나는 경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영원한 참자아를 상실하고 경계 속에서 경계와 더불어 생멸(生滅)하며 방황하는 불행한 자이다.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일은 무상(無常)하게 생멸하는 거짓자아를 극복하고 영원한 참자아를 찾는 일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그 체(體)가 허공과 같아서 붙잡을 만한 아무 것도 없지만, 스스로의 식작용(識作用)으로 스스로 드러난다. 이와 같이 드러나는 것이 마음의 작용이므로 마음은 바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식작용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그런데 식작용의 유무(有無)는 곧 식내용 즉 식(識)의 유무이다. 식(識)이 있으면 식작용이 있는 것이고, 식이 없으면 식작용도 없다. 이 점에서 식작용은 식과 서로 다른 둘이 아니다. 이 까닭에 식을 곧 식작용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식작용의 주체로서의 마음은 식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지만, 허공과 같은 마음의 본체는 식작용이 있거나 없거나 그 자체는 불변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서 다름이 없으니, 마치 허공은 뒤섞임도 무너짐도 없으면서 태양이 온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과 같다. 해가 떠올라 천하를 두루 밝힐 때에도 허공이 밝은 것은 아니고, 해가 져서 천하가 어두워져도 허공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밝고 어두운 경계는 서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허공의 성품은 텅 비어 변함이 없으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그 작용이 있거나 없거나 불변이지만, 그 작용이 없으면 본체를 말할 수가 없다. 마음 스스로의 영각성(靈覺性)에 의한 식작용(識作用)으로 본체니 작용이니 경계니 하는 식(識)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허공과 같은 마음이 중생을 말하고 부처를 말하며, 마음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하게 되는 것은 마음이 식작용의 주체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식작용의 주체는 식작용에 의하여 드러나며, 식작용은 식내용에 의하여 드러난다.


그 까닭에 마음이 곧 경계라고도 하며, 마음이 곧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見聞覺知]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경계로서 드러나 있는 식내용 즉 식(識)만을 알고 식작용과 그 작용의 주체를 모른다. 그러므로 중생은 생멸하는 식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는다. 그러나 식은 식작용의 결과 나타나고 사라지는 허상(虛像)일 뿐이므로 참 자아가 아니다. 여기에 중생이 겪는 고통의 뿌리가 있다. 그러므로 도(道) 닦는 사람은 경계인 식(識)을 버리고 참 자아인 마음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찾는다고 하면, 외면적인 경계만 버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까지도 버려야 한다. 감각이나 의식 속에 드러나는 외면적인 경계만이 경계가 아니라, 그러한 경계를 파악하고 분별하며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自認)하고 있는 것까지도 경계인 것이다. 감각이나 의식 속에 드러나는 외면적인 경계를 버리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하는 내면적인 경계를 버리기는 어렵다. 여기에 수행인의 어려움이 있다. 모든 경계를 버리고 마음을 텅 비운다는 것은 아직도 텅 빈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이 허공과 같다면 어디에 있는 경계를 어디로 버려서 마음을 비울 것인가? 허공 아닌 곳이 어디며, 붙잡고 비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허공일 뿐이라면, 잡거나 놓거나 비우거나 채울 곳이 따로 없다. 수행인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 마음이라고 자인하며 잡고 있는 것을 놓기 어렵다. 그것을 놓으면 마치 허무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잡고 있는 것은 허공인 참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분별해낸 경계일 뿐이다. 허공을 어떻게 붙잡겠는가? 허공은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계합(契合)하여 하나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스스로 마음이라고 여겨 잡고 있는 것을 놓고 허무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허공과 하나가 되며, 이 순간 허무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하나인 참 마음이요 하나인 참 법계가 된다.


다시 말하면 허공과 같은 마음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식작용을 하는 주관으로서 깨달음을 이루는 주체가 되는 법신(法身)이며, 동시에 식내용을 담고 있는 법계(法界)이다.


"⌈부처의 참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다⌋라고 하는 말은 바로 법신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법신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법신이 허공이라는 장소에 두루 퍼져있으며 허공 속에 법신이 품어져 있다고 말하니, 법신이 바로 허공이고 허공이 바로 법신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만약 허공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하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며, 법신이 있다고 단정하여 말하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으면 허공이 바로 법신이며, 법신이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으면 법신이 바로 허공이다. 허공과 법신이 달리 모양이 없으며, 부처와 중생도 달리 모양이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달리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달리 모양이 없으니, 모든 모양을 벗어나야 부처이기 때문이다.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지만, 마음과 경계 둘 모두를 잊어야 참 법(法)이다. 경계를 잊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사람이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텅 비어서 부여잡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지만, 공(空)이 본래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참 법계[一眞法界]일 따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지만 단순히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이 아니라 법신이요 법계이기 때문에 중생을 말하고 부처를 말하며 마음을 말하고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고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허무(虛無)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만법이 생동하는 법계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나누어 말하면 허공과 같은 마음의 체(體)가 식작용(識作用)을 하여 만법(萬法)이라는 식(識)의 세계가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의 체(體)․식작용(識作用)․식(識) 3자는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따라서 깨달아 마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 3자의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매이지 않고 자재(自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마음이란 본래 일진법계(一眞法界)일 뿐인데,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려 하면, 허공과 같은 본체(本體) 및 만상(萬相)을 생성하는 작용(作用)으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마음을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 곧 범부가 마음을 대상화하여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분석 없이 일진법계(一眞法界)와 그대로 계합(契合)하여 스스로가 바로 일진법계(一眞法界)임을 자각(自覺)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대상화시켜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리적(義理的) 이해를 위한 편의상의 불완전한 논의일 뿐이고, 마음을 전체로서 그대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주체적인 계합(契合)의 길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기본적으로 황벽이 사용하는 심(心)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허공과 같은 마음인 무형상(無形相)한 심체(心體) 혹은 본심(本心)으로서 청정심(淸淨心)이고, 또 하나는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드러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인 유형상(有形相)한 의식(意識)으로서의 마음인 염오심(染汚心)이며, 또 하나는 이 두 측면으로 나누기 이전의 마음인 일심(一心) 혹은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


『전심법요』에서 황벽은 마음의 이 세 측면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심(心)이라는 한 글자로써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 ‘심’(心) 자(字)가 문맥에 따라서 무형상의 본심을 말하는 것인지 유형상의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인지를 잘 구분하여 읽어야 한다.


예컨대, 생멸(生滅)․유무(有無)․형상(形相)에 속하지 않고 사려분별로써 알 수 없는 허공(虛空)과 같은 심(心)이라고 할 때에는 청정심(淸淨心)을 말하고,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하여 드러나는 육식(六識)․십팔계(十八界)의 심(心) 혹은 무심(無心)이 곧 도(道)라고 할 경우의 심(心)은 염오심(染汚心)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심(一心) 혹은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 할 경우는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을 나누어 보지 않고 오직 심(心)이라는 전체적 측면을 말한다. 청정심(淸淨心)을 심체(心體), 염오심(染汚心)을 심용(心用)이라 하면 일심(一心)이나 일진법계(一眞法界)는 체용무이(體用無二)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명의 편의상 일심(一心)을 무형상(無形相)과 유형상(有形相)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 말하지만, 동시에 이 두 측면을 부정하고 참된 일심(一心) 혹은 일진법계(一眞法界)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설법방식은, 바로 제3장에서 보았던 혜능의 대법론(對法論)과 동일한 설법방식이다.


앞 절에서 보았다시피, 상대법(相對法)을 쌍으로 대응시켜서 하나의 중도(中道)에로 회귀시키는 설법(說法)은 마조에게도 있었다. 마조의 경우는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 중생심(衆生心)과 불심(佛心)을 대응시켜서 일심(一心)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혜능의 대법론(對法論)에서는 두 상대법(相對法)이 일자성(一自性)으로 회귀되었지만, 마조와 황벽에게는 일심(一心)으로 회귀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언급했듯이 조사선의 일반적 특징으로서의 심일원(心一元)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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