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강의 23 깨달음의 거울, 선가귀감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공부 시간입니다. 다 같이 합장하시고, 마하반야바라밀 세 번 염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네, 선가귀감. 오늘은 스물세 번째 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을 배우는 사람들은 말할 때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제의 경계에 부딪치면 그만 아득해진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네, 오늘은 선가귀감의 스물세 번째 내용이 되겠습니다. 말을 배우는 사람, 학어지배(學語之輩)는 설할 때는 깨달은 것 같은데, 경계에 대하여서, 어떤 경계, 역경계나 순경계에 부딪치면 도리어 미혹해 진다. 이른바 언행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항상 말씀드린 것처럼,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 말로 아무리 뭐 공을 체득했네, 연기법을 깨달았네, 무슨 뭐 무아법을 통달했네. 이런 소리를 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현실에 역경계와 순경계를 당해서 과연 얼마나 여여부동 할 수 있느냐? 이게 바로 그 사람의 수행의 척도인 거죠.
수행의 척도는 탐진치가 얼마나 쉬었느냐? 이게 수행의 척도입니다. 현실의 경계에 부딪쳤을 때,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 또는 손해가 되는 일, 이게 바로 현실의 경계죠.
또는 뭐 억울한 일 이게 현실의 경계죠. 금강경에도 누누이 나오고 있죠. 아상을 여읜 사람이 바로 부처다. 무아법을 통달해야 진정한 보살이다. 이게 바로 부처와 보살의 기준을 잘 설해 놓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예도 들고 있죠. 자기에게 그렇게 억울한 소리를 해 대는 임금에게 나는 그저 나무 밑에서 앉아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팔다리를 비어 내고 이랬어도 결국은 윈 위치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이것을 잘 유념해야 됩니다. 수행을 아무리 뭐 오랫동안 했어도, 또는 많이 했다고 해도 그것이 생활에서 반영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사격 훈련장에서는 총을 잘 쏘던 훈련병이 실제로 전투에 임해서 총 한 방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총탄에 맞아 죽는 거나 똑같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평상시에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독경을 하고, 사경을 하고, 절을 하고 이런 것들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생활에서 역경계나 순경계에 부딪쳤을 때 여여부동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그게 주객이 전도 되지 않은 것이죠.
현실생활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 일순간적으로 동요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다시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게 바로 그 사람의 수행의 척도인 것이지, 뭐 말을 잘 한다 그래서, 또는 뭐 본인이 스스로 공을 깨달았다. 연기법을 깨달았다, 이렇게 얘기해도, 현실생활에서 그 사람이 역경계와 순경계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 거가 바로 수행의 척도고, 깨달음의 척도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상을 떠난 사람, 무아법에 통달한 이는 무아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역경계와 순경계에 크게 휘둘리지 않게 되죠. 역경계와 순경계에 크게 휘둘린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존재한다는 소리입니다. 이 허공은 아무리 거기다가 도장을 찍어도 도장이 안 찍힌다는 것이죠. 물 도장, 허공 도장, 진흙 도장. 전에 말씀드렸죠? 예. 어떤 사람은 마치 저 진흙에다 도장을 쾅 찍으면 한~동안 있다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오래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물에다 도장을 탕 찍으면 순간적으로 출렁하고 흔들리지만, 잠시 후에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그것과 같고. 또 어떤 사람은 허공에 도장을 팡 찍으면 안 찍히죠. 무아법에 통달한 이는 허공 도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나는 과연 어떤 도장을 가지고 있을까?
혹시 콘크리트 도장은 아닐까? 반성해 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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