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인연 ♣/•------선가귀감♤

선가귀감 강의 26

白道 박만주 2018. 5. 4. 08:47

 

 

                                                                                                                        

      


      선가귀감 강의 26


    깨달음의 거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공부 시간입니다.

    다 같이 합장하시고, 마하반야바라밀 세 번 염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네, 오늘은 선가귀감의 스물여섯 번째 게송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다만 자네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이지, 자네의 행실은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네, 이 대목에 대해서 주해를 서산대사께서 직접 또 주해를 달아 놓으셨죠.

    옛날 위산 스님의 물음에 앙산이 대답하기를 “<열반경> 사십 권이 모두 마군의 말입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앙산의 바른 눈이다. 이번에는 앙산이 행실에 대해서 묻자 위산스 님은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이지, 자네의 행실은 보려하지 않네.”

    라고 대답했다. 바른 눈을 뜬 뒤에 행실을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참된 수 행을 하려면 먼저 단박에 깨쳐야 한다. 


    네 , 여기서는 지금 이제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죠.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이지, 안목이 바른 것, 자네의 행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이 말은 무슨 말이냐? 바른 눈을 뜬 뒤에 행실을 말하는 까닭이다. 참된 수행을 하려면 먼저 깨쳐야 한다. 약욕수행(若欲修行)인댄 선수돈오(先須頓悟)라.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는 수행하고 나서 결과적으로 깨치는 걸로 이렇게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지금 이렇게 써놓았어요.“만약에 수행을 하고자 하며는 먼저 반드시 깨쳐야 된다.

    단박에 깨쳐야 된다.”그러니까 수행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 다시 말 해서 깨닫기 이전의 수행과 깨달음을 이룬 후의 수행이 있다. 깨닫기 이전의 수행은 문밖의 수행이고, 깨달은 이후의 수행은 문안에 들어온 수행이다.


    지난번에 십우도에서 이 설명을 했죠. 예.

    그러니까 깨닫기 전에 수행은 첫 번째‘심우’단계에 해당되는 것이고, 소 찾아 인제 출발한 것이고. 깨달은 이후의 수행은 바로 세 번째‘견우’이후의, 그러니까 네 번째 단계부터가 깨달음 이후의 수행이다. 그래서‘견우’라는 것은 견성이죠. 성품은 공한 것이다.

    이것을 터득한 거. 이게 바로‘견우’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그런 깨달음입니다.


    몸과 마음은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왜냐?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본성, 불성, 성품자리 또한 공한 것이다. 텅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거기까지 아는 것이 바로 세 번째의‘견우’단계입니다. 거기를 통과해야 비로소 문안의 수행이 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문밖의 수행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마치 몸이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알아서 몸을 닦고 마음을 닦는 수행. 이것이 바로 문밖의 수행인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몸을 닦고, 마음을 닦는 수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아~ 이제 보니까, 닦을 몸이 없구나. 닦을 마음도 없구나. 성품조차도 공한 것이구나.’이거를 확실하게 터득하고, 닦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닦을 것이 없음을 알면서 닦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진공묘유에 입각한 수행입니다. 닦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닦아야 하는 거죠. 왜냐? 진공은 묘유이

    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고 텅 비어 있는 게 아니고,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이것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것을 내가 결정한다.


    그래서 경전에도 보면 리즉돈오(理卽頓悟)라 승오병소(乘悟倂消)어니와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인차제진(因次第盡)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치는 곧 단박에 깨쳐서 깨달음을 타고 아울러서 녹아 버리지만, 이치로는 다 공을 터득했지만, 그러나 역시 사비돈제, 우리의 이 몸과 마음은 그렇게 단박에 제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렇게 단박에 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차제진이라, 차제를 인하여서 다 하게 된다. 완전연소 하게 된다. 이 소리죠. 


    이치적으로는 우리가 터득을 해야죠.‘아, 그렇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 그 진정한 불도를 닦는 것이구나.’하고 알게 되지만 살다 보면은 자꾸 과거에도 메였다가, 미래로두 갔다가, 현재에두 애착하게 되고, 이 사람을 좋아했다가, 저 사람을 미워했다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겠습니까?

    현실은 그렇게 단박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차제를 인하여서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번뇌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견소단의 번뇌와 수소단의 번뇌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과거,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오는 그런 정설입니다. 번뇌에는, 보며는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닦아야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그래서 견소단의 번뇌, 보며는 끊어지는 번뇌는‘견우’세 번째 단계만 가도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수소단의 번뇌, 닦아야 끊어지는 번뇌는 역시 닦아야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치.


    그래서 여기서 지금“다만 자네 안목이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기지 행실은 고려하지 않는다.”이것은 무엇입니까? 일단 안목이 갖추어져야 그 다음에 행실이 거기에 따라서 제대로 갖추어지죠. 근데 이런 사람도 있어요. 안목은 아직 안 갖추어졌는데 그래도 행실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예. 그러니까, 행실만 보며 는‘아, 저 사람이 안목을 갖췄는지, 안 갖췄는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예. 안목을 갖추고도 아직 행실을 못 갖춘 사람도 있고, 안목은 없는데, 행실은, 겉보기에는‘오~ 도인 같다.’이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예. 겉보기에는 굉장히 도인 같죠.


    제가 얼마 전에 정초에 지리산에 갔더니, 지리산 노고단, 천운사로 해서 이렇게 올라갔어요, 등산을. 눈이 많이 내리고 이러며는 거긴 차가 못 다닙니다. 그래서 천운사 바로 고위에다 주차를 해 놓고 계~속 걸어서 올라갔었죠. 걸어서 열~심히 걸어갔다가 인제 내려오는데, 날씨가 그날 따뜻해서 오후에는 햇볕이 좋으니까, 아~ 그 눈들이 많이 녹더라구요. 근데 햇볕이 잘 드는 양지 녘은 거~진 다 녹아서 막 물이 흘러내리고, 음지, 해가 안 드는 곳은 오전에 올라올 때랑 똑같이 그냥 얼음하고 눈이 덮여 있더라구요. 그걸 보면서‘야~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있겠구나. 예. 똑같은 번뇌 업장이라도 따뜻한 햇빛처럼 가피를 받으면 저렇게 녹아내리는 것이고, 가피를 못 받는 그늘, 음지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냥 꽁꽁 얼어가지고 언제 풀릴지 모르겠구나.’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는데, 그 주차장 있는데 가보니까는요, 하~ 정말 도인 처럼, 옷도 하~ 특이하게 입고, 마~ 머리도 백발 이예요. 거기다 수염을 백발로 착~ 길러 가지고, 하하하하하하~ 진짜 하아~ 딱 보며는‘아~ 지리산 도인 아닌가!’이렇게 느낌이 오게 그런 분이 계시더라구요. 예. 물론 인제 대화를 해 보아야 아는 거 겠지만, 근데 대화까진 못하고 지나쳤습니만은.


    그래서 겉보기에는 도인처럼 보여도 그 사람이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좀 도인이 아닌 거 같애도 안목이 갖춰져 있으면 시간문제입니다. 행실이 갖춰지는 것은. 근데 안목이 안 갖춰져 있으면은 일시적으로 도인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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